플라토닉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것을 보며..
플라토닉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것을 보며..
일반적으로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이단이라는 것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12세기에서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삼위일체를 인정하면서도 임의적 차원에서 삼위를 말하는 경향이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공교회에서 비판하고 정죄하였지만 그러한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었고 현대의 신학의 매력적 변증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함을 주목하게 되는데 참으로 기만적인 세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실체를 언약이라는 것으로, 인위적 규정하여 언약이라는 실제적 판단에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에덴버러 신학장의 모습들과 그러한 신학적 전통에서 이루어지는 신학과 신앙을 볼 때에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보겠느냐는 그러한 말씀을 절감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은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입장을 바르게 분별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파생되어졌고 지금도 그러한 사상적 연속성 속에서 고민해야 하는 그러한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함이 없이 삼위하나님을 합리성의 제한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착각하고 그로 인한 그러한 잘못된 인식을 비판하면서 마치 하나님을 비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어리석음의 비평들이 득세를 말하려고 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기를 기도하는 종들로서 우리 성도들의 전인격적인 회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꼬리말 쓰기
이명신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새겨봅니다. 자존의 하나님의 광대하심 그 보편성이 세상의 상대적인 보편과 상대적인 초월이라는 플라톤적 신관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005/03/05]
이명신 인위적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며 그러한 자들은 이단에 대한 답변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상실했습니다. [2005/03/05]
이명신 그러한 자들이 신앙의 신조를 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해석적 정황이라는 인식의 판단이라고 함의 기준이 신관이 이미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005/03/05]
이명신 한신대 김경재 교수의 유일신 비판도 마찬가지로 폴틸리히의 non-being의 사상에서 하나와 여럿의 상관성에서 고민하며 상황적 보편에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의 신관은 자체적 당위성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05/03/05]
이명신 하나 숫자라는 개념이 편협함을 김교수는 비판했는데.. 하나님 자신의 절대 보편은 그러한 하나라는 상식적 편협의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자체적 보편은 그러한 상식적인 편협의 판단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김교수님은 하나와 여럿의 딜레마에서 비평학의 자료를 따라서 비판가능성을 제기한 것뿐입니다. [2005/03/05]
이명신 비교종교학이라고 함에서는 자체적 합리성의 정당함을 말하지 못한다는 전제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05/03/05]
http://geocities.com/vosscare
일반적으로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이단이라는 것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12세기에서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삼위일체를 인정하면서도 임의적 차원에서 삼위를 말하는 경향이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공교회에서 비판하고 정죄하였지만 그러한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었고 현대의 신학의 매력적 변증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함을 주목하게 되는데 참으로 기만적인 세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실체를 언약이라는 것으로, 인위적 규정하여 언약이라는 실제적 판단에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에덴버러 신학장의 모습들과 그러한 신학적 전통에서 이루어지는 신학과 신앙을 볼 때에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보겠느냐는 그러한 말씀을 절감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은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입장을 바르게 분별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파생되어졌고 지금도 그러한 사상적 연속성 속에서 고민해야 하는 그러한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함이 없이 삼위하나님을 합리성의 제한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착각하고 그로 인한 그러한 잘못된 인식을 비판하면서 마치 하나님을 비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어리석음의 비평들이 득세를 말하려고 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기를 기도하는 종들로서 우리 성도들의 전인격적인 회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꼬리말 쓰기
이명신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새겨봅니다. 자존의 하나님의 광대하심 그 보편성이 세상의 상대적인 보편과 상대적인 초월이라는 플라톤적 신관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005/03/05]
이명신 인위적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며 그러한 자들은 이단에 대한 답변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상실했습니다. [2005/03/05]
이명신 그러한 자들이 신앙의 신조를 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해석적 정황이라는 인식의 판단이라고 함의 기준이 신관이 이미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005/03/05]
이명신 한신대 김경재 교수의 유일신 비판도 마찬가지로 폴틸리히의 non-being의 사상에서 하나와 여럿의 상관성에서 고민하며 상황적 보편에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의 신관은 자체적 당위성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05/03/05]
이명신 하나 숫자라는 개념이 편협함을 김교수는 비판했는데.. 하나님 자신의 절대 보편은 그러한 하나라는 상식적 편협의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자체적 보편은 그러한 상식적인 편협의 판단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김교수님은 하나와 여럿의 딜레마에서 비평학의 자료를 따라서 비판가능성을 제기한 것뿐입니다. [2005/03/05]
이명신 비교종교학이라고 함에서는 자체적 합리성의 정당함을 말하지 못한다는 전제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05/03/05]
http://geocities.com/vossc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