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swers to antichristisms

화요일, 9월 04, 2007

종교세 납세와 참정권

납세와 참정권..


국가의 어려운 제정상태를 의식해서 세금의 적절한 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옳다고 봅니다. 그러나 세금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돈을 벌기 위한 기업으로서의 노력적 당위성이 있다고하면 그것이 당위성을 가지고 있지만, 돈을 벌기위한 것과 이윤창출이라는 것을 따르지 않는다면 세금징수로서의 의미와 규정은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각주1)

아이들이 부모에게 용돈 받는 것과 같은 것도 앞으로 세금으로 거두는 것이 좋겠다.. 나라가 어려우니까.. 그러한 극단적인 측면을 야기하는 것과 비교하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 소득 탈루혐의가 있는 전문업종의 사람들의 세금을 받게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돈을 벌기위한 것이 아닌 것에 대하여서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기만된 여론조작이라고 함을 읽을 수 있고 국민 여론적 통계는 이러한 기본적인 세금의 의미를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라고 함에 따라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당위성을 가지지 않는다고 함이 옳은 것입니다.


통계의 중요성과 고려는 마음에 두어야 하지만 그러한 그러한 조작과 기만성도 같이 있음에 대한 것도 적지 않게 마음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납세를 할 경우 고려해야 할 것은..

납세를 하게 되면 참정권과 같은 것을 의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직자를 마음에 두고 언급되는 것이 기본인데.. 그들이 기초생계비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생활비를 국가가 지원해야 합니다.(각주2)

기독교를 비판했던 프랑스에서도 똘레랑스라는 입장에서 정교의 분리를 말하고 있거늘, 참정권도 따라온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납세에 대한 의무만 강요한다는 것은 정교의 혼란을 가져올 것에 대한 생각없는 입장이 될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에서 이미 그러한 입장을 취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있는데 그래서 그러한 정치에 대한 호응과 그러한 참정권적 입장에 찬성하고 있고 그것에서 주고 받는 세상의 청지기의 길을 걷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입장이 기독교의 참된 실재적 입장은 아니라는 것은 성경에서 불의한 청지기적 비유의 말씀에서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해외의 경우를 말하고 있는데 해외의 경우에서도 신학적 사조라고 하는 것이 헝켜서 자유주의적 개념에서 정교의 분리적 입장을 말하지 않는 자들도 있고 그들의 주류적 개념에서 있게되어지는 상황들을 고려하지 않고 예를 발취하는 것도 분별없는 인용적 정신이고 그러한 정신에서 국민의 여론을 기만하는 행위를 세운다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정교의 분리.. 그것을 원치 않는 것이 참정권을 무시한 납세의 당위성을 말하는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국가의 혼란을 야기하지 않으려면 똘레랑스적인 그러면서도 정교의 분리적 입장을 말할 수 있는 종교인 성직자의 세금운운은 하지 않는 것이 세상적으로도 지혜로울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서 정교의 상관성이 있으나 정치가 신앙을 비로소 말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러한 가운데서도 신앙적 측면에서 정치를 말할 수 있는 합리적 사유의 방향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국가와 신앙의 범주이해에 대한 결핍으로 오도되어진 여론을 등에 엎고 정교혼합에 따른 국가의 위기를 초래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적인 것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주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서 우리의 삶의 존재를 맡긴다는 중심의 신앙고백으로 돈과 상관없이 섬기는 것이 기독교의 종들의 모습의 실상입니다.


세대가 어렵다보니 그러한 섬김을 섬김으로나타나는 예물을 돈벌이로 생각해서 탐내고 있는 모습을 볼 때에 과연 돈을 사랑하는 악함이 국가의 어려움을 초래하는 악함으로 나타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국민 여론의 수렴이라는, 통계라는 개념의 고려성을 실제성으로 생각하기 앞서 납세라고 함의 기준점과 의미와 그에 따른 청구를 바르게 할 수 있도록 하심이 좋겠고, 주의 종들은 그 섬기는 예물을 바르게 받지 못할 때에는 섬기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책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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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1) 직업이라고 하는 것은 재물을 얻기 위한 것으로서의 합목적적인 활동을 전제로하고 있고 또한 그러한 것을 이루어나가는 것이라고 할 때에, 직업이라고 해석 가능한 것이, 직업 비로소 그 직업 자체로 규정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닌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직업뿐만 아니라 비영리단체라는 측면에서는 그와 같은 측면의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교회와 같은 종교적 입장에서는 수입을 위한 합목적적 경우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익창출이라는 개념으로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세금을 의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각주2)예를 들어, 한해에도 신학교에서 졸업하는 신학생들이 몇백명씩 된다고 할 때에 그들이 그러한 참정권에 따른 권익을 주장하고 교회 개척을 한다면 그들을 국가가 생활비를 지원해야 할 것입니다. 기초생활비로 그들을 도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적 입장에서 도움을 받는다면 성직자는 설교시간에 '정치적인 이야기와 비판을 할 수도 있고 선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단체들이 모두 정치적인 참정권에 따라서 '이익단체'로서 '압력단체'로서 맨날 국가에 데모한다고 해도 전혀 불법이 아닐 것입니다.

앞서 언급되어진 상황과 또한 정치적 참정권을 통한 권리를 위한 투쟁은 합법적인 것이 된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합법적으로 국세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창구도 보장되어지고 해석적 적용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 합법적 당위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목요일, 6월 21, 2007

외마디 비명에 대하여..

글을 씀에 있어서

상대방이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에는 동정적 입장에 설 수도 있는 것이 인지상정적인 것으로서의 당위성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에서도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분별을 왜곡함이라고 하는 것이 결코 분별력을 갖추지 못할 때에 이어서 그 악함의 전혀 반성적 입장이 있을 수 없다면 그러한 동정적 입장의 당위성도 존립할 수 없는 것이 당위성을 얻게 된다.



몇마디 '비명'에 해당하는 것에 대하여

1,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어원적 고찰에 대하여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어원적 고찰은 임의적 어원고찰이라는 개념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카드어로의 표기되어진 어원적 분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가능태적인 실제론에 따른 인식론적 존재론으로서, 이미 자체적 존재의 정당함을 정당하게 스스로 취하는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계시를 비로소 판단함의 사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카드어적 어원적 실제라는 개념은 임의적이라는 가능테의 당위성을 정당함의 근거로 삼고 있는데 그것 역시 상대적 정당함으로서 자존의 절대 정당함을 비로소 판단함의 정당함을 비로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합리적 가능성의 정당성이 존재적 가능성으로서의 정당함을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상대적이나마 전통적인 측면에서의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인식론'이라는 것이 비판받아왔지만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모순조차도 판단할 수 없는 자존의 절대자의 신실성은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적인 측면의 여지로서의 보편성을 띠는 하나의 가능태로서의 합리적 존재적 근거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며 판단 가능하다고 하여도 그것의 정당함은 이미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으로서의 그 성립가능성으로서의 합리적 당위성도 그 행방을 그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이 된다. 한마디로 근거없는 뜬 구름을 잡는 헛된 소리로 사람을 기만하는 사실로 전락할 뿐이다.


2. 불가지론을 주장할 자격에 대하여서

이미 합리성에 대한 행방의 실존을 말할 수 없는 안티적 개념에서는 이런 언급조차도 그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수행적 모순이라는 개념에서 발언적 입장을 전제해본다면,

먼저 인용한다면

기독교는 "절대주는 기독교의 여호와다" 라고 주장을 하려면, 그것을 보조할 객관적인 이론이 성립되어야 할 것이며, 기독교를 믿을 믿음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죽어버린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해명해내야만 할 것이다. "기독교에 들어가 보았더니 그곳에 절대주가 있더라","기독교의 여호와를 믿지 않으면 모두 지옥에 가야만 한다" 라고 주장하려면 위의 모순점에 대해서 반드시 해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 적그리스도, 닉네임, 반기련 -


답변

개념이해가 안되고 있다. '절대'라는 개념은 상대적 여지에서 고립되어진 것으로도 이해되어질 수 있고 또한 상대적인 것과 달리 고정되어진 것으로서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옥스포드 사전에서 별반 다름없이 정의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 '절대'라는 개념이 신의 속성적 개념이라는 것이 이미 전제되어진 상태이며 신의 실존이해에 따라서 구별되어진 속성으로서의 절대의 개념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즉 절대라는 개념이 무슨 보조개념이 있어야 한다는 상식에도 납득되지 않을 소리를 하고 있는지 너무 비상식적인 발언을 하고 있음에 식상하기 그지없다.

정말 상식적으로도 사고되어질 수 있다면 신의 속성으로서의 절대라는 개념이 구별되어진 것이며 오히려 옥스포드의 개념과 철학적 개념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는(각주1) 철학적 개념들을 구별하여서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역으로서의 개념은 항상 성립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각주2)을 기억할 때에 모순이라는 개념적 임의적 규정은 그 글을 쓴 자의 잘못된 인식의 의지적 표현일뿐 객관성을 이미 잃은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한 임의적 주장의 당위성에서의 해명요구는 기각되어지는 것이다.

기독교의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의 증거에서는 그러한 상대적 모순이라는 개념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면서도 상대적인 모순적 입장의 것을 구별하여서 증거하실 수 있음에 대한 당위성은, 절대 자존적 정당함을 취하시는 분으로서, 그것을 스스로 취하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인 여지가 있는 것을 가지고도 절대적으로 합당하게 말씀하실 수 있으며 예수의 증거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인 형태를 가졌음에도 그의 증거가 절대적인 이유는 그의 신실함으로서의 이 이유에 근거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고 하여도 신이라는 존재가 이성적 판단의 범위에 한정된다면, 속된 표현으로 부인할 수 있다면, 신일 수 있는가? 상대적인 판단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입장이며 입증자료 청구라는 어리석음이 무색하지 않은가?



3. 근본주의라는 표현에 대하여서

개념없는 질문의 사도가 되기를 요청한 니체의 합리성의 화려함을 보아주어서 수행적 모순으로, 전제적 글을 쓴다는 것에 인내의 한계를 말할 수 있을 것같다.

비판의 성립되지 않음은 근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근본적 비판을 위한 근본적 소제선택에서는 실패한 인식구도에 자기 모순적 입장인 것을 지적할 수 있겠다. 예수불신 천당 지옥을 외치던 선구자(?)들이 그 내용적 입장에서는 합당하지만 표현기술적 입장에서는 연약함을 지니고 있음은 현대에서 재고할 수 있는 것임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그가 기술한 그것에서와 같이 표현적 기술이라는 형식적 방법으로써 내용적 실제의 사실을 비로소 근본적으로 비판함의 당연함을 근거지울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 그들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또는 기독교의 본질적 왜곡을 해서 재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른 분별에 있어서 전도의 양식의 변화와 지혜라는 것을 좀더 더욱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지 본질이 잘못되어서 재고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방법은 달리할 필요성이 있지만 그런 방법들을 통해서도 선히 역사하시길 기도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신앙의 근본의 보편적 이해의 기본적 전제를 모순적이라도 하고 비판을 하는 것이 상식적인 예의를 갖춘 자의 모습이 되어질 것이다.



4.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에 대하여

형태적 유사비교라는 개념에서, 특히 임의적 종교개념에서 즐겨 비판적 사료를 내놓는 경향이 있는데, 중요한 것은 유사비교라고 할 때에도, 인식의 동일범주라는 개념에서 가능성의 따른 당위성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부여할 수 있다. 그러한 개념없이 유사비교라고 하는 것은 그 사유의 행보에 있어서 '엉뚱하다'는 판단의 당위성이 따라온다는 것은 기본적 상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유에 있어서의 범주의 설정이라는 것이 그 실재론에 따른 실제의식에서 규정되어지는 것인만큼 실재론에 대한 개념이 불분명하면 이러한 인식과 논리에 있어서 유사비교의 화려한 합리성의 기만에 속을 수 있는 경향이 있다고 하겠다.

하나님의 신지식에 대한 개념의 부족, 특히 신인식에 대한 개념이 이미 앞서 지적되었는데,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실존적 개념의 합당함을 말하지 못하면서 유사비교의 합리성의 당위성을 의지하여서 하나님을 규정하여서 잘못되었다는 표현을 한다면 그 이성적 성급함과 지혜없음은 그 존재의 가벼움을 지적할 뿐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죄악 가운데, 시간인식에 따른 사람들의 인식의 발생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지식의 합당히 받을 수 없음에 있어서 있게되어지는 신전제사의식의 왜곡되고 잘못된 인식으로서의 토템과 사마니즘의 기원을 말함이 더 설득의 당위성을 상식적으로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둔다.



결론적으로

상대방의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을 세워주는 것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고 그러한 일말의 합리적 자기 발언에 대하여서 참아주고 표현의 당위성에 대하여서 연민의 당위성으로 받아줄 수도 있는 것이 상식적인 예가 될 수 있지만 그러나 기본적인 것까지도 받을 수 없도록하는 모습에 바른 이성적 비판이 있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는 차원에서 당위성에 따른 묵과라는 개념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더욱 그가 기독교인의 답변의 당위성을 임의적으로라도 말하였기에 그것에 따른 답변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부인한다는 개념의 실제의식에서는 결코 안티라는 개념으로부터의 정당성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만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한 노력의 비판은 있을 수 있으나 분별력이 죄악가운데서 성실하지 못함에 따라 형식적인 안티의 실존은 항존하겠지만 그것은 진정한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이며 그 흥망성쇠는 그 피곤을 그 합리성의 유희로 자위하기는 고통과 어려움이 실제할 것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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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1)버틀란트 러셀, 철학이란 무엇인가,황문수역 문예출판사

러셀의 철학의 문제들이란 그의 저술로 그의 사상적 기조가 바뀌었다고들 할 수 있으나 기본적인 그의 인식의 기본을 말하는 것으로서 좋은 책인데, 그의 기술중에서는 절대라는 개념이 상식밖에 개념으로서 이해하는 경향을 읽을 수 있다. 신비와 같은 개념도 그와 같이 읽을 수 있도록 말하고 있는데 불가지론적인 측면에서도 가지론의 당위성을 상대성에서 두고 있는 가운데서 가지성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수 있다. 이 책을 참고하는 것을 권하는 정도로 언급해두겠다.

옥스포드 사전에서는 그러한 개념정리가 아주 상대적인 것과 달리 고정되어진 것으로도 묘사되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역시 이러한 철학적 기반에서 해석된 언어선택과 규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써 유익하나 그러한 신인식에 있어서의 속성적 기술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하겠다.

각주2) '역으로서의 개념은 항상 성립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

p→q이다. 또는 q→p이다와 같이 이러한 조건적 개념에서 동일한 전제적 명제들이라고 할 때에 항상 동일하게 '참'(T)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대우명제라는 것이 존제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대우명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에, 그러한 참을 위한 전제조건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상대적인 표현을 하셨다고 함에 있어서 상대적인 표현이라면 하나님을 항상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의 대우명제는 성립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절대와 상대의 상관관계라는 개념이 이미 다른 개념으로서의 상대적 개념으로서 조건명제가 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현상적 개념에서의 유사비교를 이러한 잘못된 기술적 형식논리를 기반으로 해서 따르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하겠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인간적 형태로서 해석해서 신을 묘사한다는 것은 기본적인 이성적 판단에서도 수행되어질 수 없는 모순인 것이다.

월요일, 7월 24, 2006

가짜신(神)을 동의 구하는 글에 대하여

답변)거두절미의 묘미를 보는 것같군요.. To Debate(모든 논쟁을 위해) 2006.07.22 20:14
거두절미라는 것.. 앞 뒤 가식적인 듯한 판에 박힌 것을 다 용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생략하고 본론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말씀하신 분도 그와 같은 그러한 측면을 따르는 듯한 것을 지적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상당히 예의를 갖추어서 말씀하심에 먼저 이러한 표현 즉 거두절미라는 판단이 어울리지 않고 예의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으나 적절한 지적이 될 수 있을 것같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저에 대한 칭찬이라고 하는 것이 가식적이라는 생각이 강요되어지고 있고 진정 예를 갖춘다고 할 때에는 제가 이미 제안했던 말들 중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유교집안의 불교신자를 자청하신다고 하더라도 제가 앞서 말한 것에 대한 생각을 마음에 두지 않으셨다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나 사상의 전개를 위한 질문에 있어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앞서 말한 것에 대하여서는..

신이 상식적으로 부인되어질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상식이 될 수 있음에 대한 개연적인 사실이라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 물론 그런 상식에서 비로소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상식에도 벗어나지 못하는 인식에서 다른 질문들이라고 하는 것들이 그 실존적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쯤은 생각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글씀을 요구함에 있어서

그리고 아주 지혜롭게 자신의 무지라고 하는 것에 대한 겸손으로써 상대방의 어휘를 주장하겠다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가 아닐 수 있음에 대하여서는 생각하고 함부로 무지적 당위성에 따른 글을 제한하는 실례를 범하는 일은 없으시길 바라겠습니다. 논쟁과 답변에 있어서 어휘선정은 글쓰는 사람의 자유입니다. 동등되게 논쟁의 상대로 생각함에 있어서는 그 어휘이해를 위한 노력은 상대방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말해둡니다. 저도 상대방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에는 물을 수 있는 용기도 있고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저보다 더 많이 알고 계신 분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많이 안다는 것과 바르게 안다는 것은 또한 다른 개념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이해를 위한 글쓰기를 제한하는 실례를 구하기 보다는 이해를 위한 질문하여 배우는 용기를 가지도록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안티적인 입장에서는 이미 배우고자 하는 용기보다는 상대방의 글쓰기의 자유를 억압하는 폭력을 의도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반박의 글쓰기 기술인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상식적으로도 인격적으로도 바른 중심을 가지도록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대화를 위한 방법론적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전반적인 답변과 반론에 즈음해서..

신의 실존에 대한 부정을 할 수 없다고 할 때에 그리고 신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알고 비판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답변없이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이해와 그에 따른 합리성을 갑을논박한다는 것은 어리석다는 표현을 말함에 있어서도 상식적으로나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비판의 실존을 말하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인 것을 말씀하신다고 할 때에 그 정당함은 자존의 하나님께서 규정하심을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실존과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합리성에서 비로소 비판적 당위성의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둡니다. 동일한 상대적인 형태적 개념만 가지고 상대적인 것의 차이와 그 허구의 사실을 말하려고 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합리성은 있으나 그 합리성의 사실의 정당함은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합리성의 합목적성시비.. 그것은 정당성의 시비의 한계적 범위에서 실존적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한계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상대적인 합리성에서 비로소 자존의 절대적 정당함이 부여되어지고 절대적 보편성이 부여되어진 상대적 합리성을 동일비교한다는 것은 임의적인 당위성에 입각한 것으로 그 정당함이 기각되어진 것이라고 함을 말해둡니다.

앞서 말하는 것은 전 안티들의 합리성의 추구과 목적이라고 하는 것의 합목적성이 절대의 자존적 정당함을 가지신 하나님의 상대적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을 판단함에 있어서는 그 상대적인 것일뿐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정당함이 개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안티들은 이 한계를 넘지 못하고 넘으려고 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 정당함이 결여되어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를 판단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절대의 자존자가 말한 상대적인 것은 절대의 재가와 절대의 보편성이 부여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비로소 상대적인 합리성의 개체적인 질문은 이미 그 실존이 기각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미 질문이라고 하는 것이 합리성의 범주에서 이미 부정되어진 것들이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답변함에 있어서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지만, 질문함에 답변의 개체적인 답변을 한다면..


질문 인용 1

1. 만민평등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1) 기독교는 만민평등주의 맞습니까?
2) 인간이 어느곳에 태어나느냐는 님이 믿고 계시는 그분이 정하시는 겁니까?
3) 님이 믿는 신은 오직 지구에서만 인간이 살도록 하셨습니다. 태양빛과 복사열 자전 공전등을 그분이 정하신거지요?
4) 흑인,백인,황인종등도 그분이 만드신거지요?


답변1)

질문을 위해서라도 개념정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동의되어질 수 있는 개념의 성립을 위한 질문이군요.. 그러나 동의되어질 수 있는 개념은 아닌 것같군요..

평등이라고 하는 개념은 그 실체가 인권이라는 개념에서 부여할 수 있는 상호적인 최상적 개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평등이라고 하는 개념이 기독교를 판단한다고 하면 인위적인 기독교 해석적 당위성을 놓기 위한 것뿐으로서 동의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인권에서 평등의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옛 철학자들도 상당히 규정하지 못한 가운데서 실증적 개념의 평등으로 다수를 위한 것으로 유익을 말할 때에 그 평등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지고 규정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하시는 분의 입장에서는 인권이라고 하는 것에서의 평등 이상의 개념을 마음에 두지 않고 계시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에 인간보다 못한 신론적 개념으로써의 입장을 취하시고 있고 좀더 확장한다면 철학적으로 인식론적 존재론으로 신론을 규정하는 인위적인 신관을 가지고 비판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한 한 개념을 동의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인식론적 존재론이라고 하는 것이 그 자체적 정당함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한 개념을 상대방에게 동의되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비로소 시작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 인식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그러한 판단을 받아야할 당위성에 메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존의 절대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인간의 인식의 판단을 받는 불안한 존재라면 그것이 진짜 신이라고 하겠습니까.. 결국 개념정의를 위해 제안하는 것은 그 합목적성이 가짜신을 말해놓고 그것이 기독교의 신이다고 동의를 구한 가운데서 재청적인 개념의 합리성의 모순을 말하고자 하는 의도와 합목적성이 보이니 얼마나 상식적으로도 몰상식적이라는 판단까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자존의 절대자를 믿고 그에게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기독교의 실존적 정체성을 이해할 때에 1) 기독교는 만민평등주의 맞습니까? 라는 질문은 이미 모르고 질문하는 것이나 모르기를 작정한 자의 기만적 의도를 가진 가운데서 질문하는 것밖에 안되는 성립되어지지 않는 질문입니다. 즉 성립되어지지 않는 질문에 답변을 구하고 있는 것은 정신적으로도 미숙을 말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외 다른 질문들도 그러한 판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인간이 어느 곳에서 태어난다 또는 인간의 지구에서의 삶 태양빛과 복사열 자전 공전, 흑인 백인 황인등의 성립에 대한 질문도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상대적 존재로서의 주체적 인식의 한계를 신의 인식의 한계로써 이해하려고하는 도피하는 이성들의 화려함.. 그것은 상대적인 개념의 미완과 정당함의 실존의 여부를 말할 수 없는 것들의 합리성의 파편들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교도들과 안티들의 모든 질문과 경영도 그러한 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 인용 2

2. 그분의 의도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1) 흑,백,황인종을 만드신 이유를 만드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2) 크게보면 유럽 = 백인 아시아,아메리카 = 황인 , 아프리카 = 흑인 대충이렇지요? 미국은 인디언들의 땅이었으니까요.(제가 잘못알고있는지도모르겠습니다.)
흑인들에게 사막에서 살게하고 과거 노예생활을 하고 미국에선 아직도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인간이하의 취급을 당하게 하며 지금도 기아와 질명에 허덕이고 원시적인 생활을 하며 심지어는 인육을 먹는 부족까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님의 신을 만날 기회마저 주지않으셨으며 그러한 삶에 만족하게 하셨는지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이스라엘 민족은 히틀러에게 갖은 핍박을 당했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 현 중동에선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이유가 과거 종교,종파싸움이 대부분이었던 전쟁과는 달리 영토분쟁입니다.
그것도 오랜전쟁으로 폐허가된 레바논과.....
그게 일본이 제국건설을 위해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식민지배한 것과 다른점은 무엇입니까?

5) 전 세상의 모든 대립격차를 욕구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과거 원시시대에는 가장 원초적인 식욕때문에 서로 싸우고 부족이 생기고 조금씩 사회가 형성되자 영역욕심때문에 싸우고 지도자들이 생기면서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기를 바라는 욕심때문에 다른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비난하고 싸우고 대충 민족별로 평등하지는 않지만 자기영역 확보하고 국가를 만들고 하니 내부에서의 분쟁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이 지식수준도 높아지고 감성보다 이성이 중요시되는 요즘 차마 전쟁은 못하고 신경전을 하지요 일본의 독도야망. 중국의 간도주장, 미국의 석유욕심등.. . 인간에게 욕심이라는 것을 주신 이유는 무엇이며 이렇게 서로 죽이고 싸우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는 것을 아시면서 없애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어떤분이 그러시던데 인간에게 고통을 주신 이유는 그것을 이겨내고 믿음을 버리지 않는 그것을 바라시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대충 맥락은 그러하였습니니다. 과거에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여 궁창의 물을 내려 다시 시작하셨었지요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아지고 세상이 썩어가서..그후 다시 지구에 인간은 50억을 넘었으며 세상은 미쳐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엽기범죄가 늘어가고 있지요. 지금 세상은 아직 노아의 방주 이전보다는 보기 좋으신겁니까? 그래서 아직 벌을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답변 2)

한마디로 행하시는 분에 대한 인식없이 그의 행하심을 말한다는 것은 이미 합리성의 모순을 말할 수 밖에 없다는 당위성에서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어떤 글을 읽을 때에 그 글쓴이에 대하여서 조사하고 그러한 조사되어지고 이해되어진 가운데서 그의 글을 이해하는 것이 그 글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합리성에 대한 판단이 되어짐은 상식적으로도 인정되는 바인데.. 안티들은 그러한 개념없이 자신의 이해라는 것의 모순을 그 상대방의 주체적 모순이라고 하는 것에서 상대적으로 자기 정당함을 찾으려고 하니 정말로 상식적으로도 상식이 없는 상식이 몰락한 모습이라는 판단이 가능한 것입니다.

몰상식이라는 표현이 가능한 그러한 것이지만 몰상식이 상식의 특이한 한 부분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을 힘써 이해하려고 노력함에 있어서 몇가지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1. 인종에 대한 것

아브라함 카이퍼는 세 인종에 대한 것을 그의 스톤강의에서 말한 바 있고 그가 그 인종우월적 개념에 의미가 있는 것과 같이 말한 것에 대하여서 기독교 내에서도 비난의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카돌릭측에서도 문서적인 측면에서 그러한 세 인종이라고 하는 것의 발달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으로도 알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하여서는 기독교 전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의 대표적인 표현들로서의 사실을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기독교 자체를 비판하는 것으로써 개별적인 비판의 당위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인종의 다양성의 발생설에 대하여서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확정하여 규정할 수 있는 합리성의 근거는 없다고 봅니다. 즉 자료불충분의 사실에 대한 개념적 비판은 성립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씀드려두겠습니다. 즉 사실적 근거라는 개념이 희박한 것들에서 사실논쟁을 한다는 것은 비합리적 것으로 논쟁적 의미와 사실을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의 인종의 다양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에 대한 것은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월적 개념으로 인한 그러한 불상사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하심을 모순되게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있어서는 그러한 비판적 당위성이 합리적이기는 하지만 그 합리성에 대한 정당한 인식적 납득 당위성은 절대의 자존자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비판적 합리성을 세울 수 없는 가운데서도 자존적 절대 정당함이 있다는 측면에서 그 비난의 당위성 강요는 기각되어지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 민족은 히틀러에게 갖은 핍박을 당했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어떤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도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했음에 대한 댓가로서 그렇게 현실적인 고통을 받고 그것이 한 예로서 히틀러에게 핍박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일말의 여지는 있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저는 개인적으로 그러한 것에 대한 판단도 그렇게 옳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심이라고 하는 것은 계시로서의 그러한 일이고 이제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서는 이스라엘이 성경의 특별계시적 존재로서의 존재적 의미는 상실되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도 예수님을 믿어야하는 일반 모든 민족과 다를바없는 일반적인 민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계시의 연장적 의미에서의 그 댓가로서 히틀러에게 고통당한 것과 관련시키는 것은 계시의 완성과 성경적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틀러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을 당한 것에 대하여서 기독교가 그 정체성 시비를 위해서 답변해야 할 것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3. 그외..

다른 질문들에 대하여서는 의미를 부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군요.. 답변을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답변을 구할 수 있는 질문적 성립이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앞선 질문도 마찬가지이지만 그것에 대한 의미를 저의 입장에서 부여하여 말씀드릴 수 있는 정도일 뿐입니다.

중동이라고 하는 사태도 사실 계시와 연관성이 있지 않은가 하는 그러한 질문도 있을 수 있는데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일반 계시적 영감이라고 하는 것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한 이야기와 그것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에 대한 것은 여기서 답변으로써 의미를 부여할 만한 것은 아니고 또한 지면적인 측면에서도 필요 이상으로 장황해질 것같아서 그냥 조금씩 차후에 논의할 수도 있겠다는 정도로 논의에 있어서 예의를 표하겠습니다.

그리고 로마신화에 대하여서는 별로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다만 그냥 읽었던 것이 생각나서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신학적 논의를 처음부터 할만한 분위기도 아니고 받을 만한 사람들도 없는 것같아서.. 물론 저보다 학식이 있는 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논의를 위한 준비를 갖춘 분들로서 글이 올라오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을 비판하기 전에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졌는가 생각하시고 바른 인식을 가졌다고하는 그러한 중심이 있을 때에 비로소 비판적 고찰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서 잘 모르면서 비판한다는 자체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니체는 진리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질문해라는 말을 했는데.. 그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을 몰상식으로 이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각없는 질문의 나열.. 허사를 경영하는 자들의 화려한 이성적 표현일뿐 그 표현과 사실성에 있어서는 그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말할 수 없음을 기억함이 하나의 지혜가 되어질 것입니다. 앞뒤를 가리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도 지적해두겠습니다. 안티라는 개념에서는 그 자체적 정당함의 합리성을 사실화하여 내놓을 수 없습니다.







(안티기독인의 질문)

와이즈님 정말 똑똑하시고 현명하신분이신 듯합니다. 질문드립니다. 성경의 허구 2006.07.22 10:55 미륵(zaksal9) 새싹멤버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드리겠습니다.
전 특정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유교사상이 깊은 집안에서 불교신자를 자청하는 사람입니다.
님의 프로필을 홈페이지에서 확인 했기에 저에대해서도 대충 말씀드리는 겁니다.

대답하기 곤란하거나 질문이 말도안된다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질문들어가겠습니다.

1. 만민평등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1) 기독교는 만민평등주의 맞습니까?
2) 인간이 어느곳에 태어나느냐는 님이 믿고 계시는 그분이 정하시는 겁니까?
3) 님이 믿는 신은 오직 지구에서만 인간이 살도록 하셨습니다. 태양빛과 복사열 자전 공전등을 그분이 정하신거지요?
4) 흑인,백인,황인종등도 그분이 만드신거지요?

2. 그분의 의도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1) 흑,백,황인종을 만드신 이유를 만드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2) 크게보면 유럽 = 백인 아시아,아메리카 = 황인 , 아프리카 = 흑인 대충이렇지요? 미국은 인디언들의 땅이었으니까요.(제가 잘못알고있는지도모르겠습니다.)
흑인들에게 사막에서 살게하고 과거 노예생활을 하고 미국에선 아직도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인간이하의 취급을 당하게 하며 지금도 기아와 질명에 허덕이고 원시적인 생활을 하며 심지어는 인육을 먹는 부족까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님의 신을 만날 기회마저 주지않으셨으며 그러한 삶에 만족하게 하셨는지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이스라엘 민족은 히틀러에게 갖은 핍박을 당했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 현 중동에선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이유가 과거 종교,종파싸움이 대부분이었던 전쟁과는 달리 영토분쟁입니다. 그것도 오랜전쟁으로 폐허가된 레바논과..... 그게 일본이 제국건설을 위해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식민지배한 것과 다른점은 무엇입니까?
5) 전 세상의 모든 대립격차를 욕구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과거 원시시대에는 가장 원초적인 식욕때문에 서로 싸우고 부족이 생기고 조금씩 사회가 형성되자 영역욕심때문에 싸우고 지도자들이 생기면서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기를 바라는 욕심때문에 다른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비난하고 싸우고 대충 민족별로 평등하지는 않지만 자기영역 확보하고 국가를 만들고 하니 내부에서의 분쟁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이 지식수준도 높아지고 감성보다 이성이 중요시되는 요즘 차마 전쟁은 못하고 신경전을 하지요

일본의 독도야망. 중국의 간도주장, 미국의 석유욕심등.. . 인간에게 욕심이라는 것을 주신 이유는 무엇이며 이렇게 서로 죽이고 싸우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는 것을 아시면서 없애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어떤분이 그러시던데 인간에게 고통을 주신 이유는 그것을 이겨내고 믿음을 버리지 않는 그것을 바라시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대충 맥락은 그러하였습니니다. 과거에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여 궁창의 물을 내려 다시 시작하셨었지요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아지고 세상이 썩어가서..그후 다시 지구에 인간은 50억을 넘었으며 세상은 미쳐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엽기범죄가 늘어가고 있지요. 지금 세상은 아직 노아의 방주 이전보다는 보기 좋으신겁니까? 그래서 아직 벌을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질문할게 많았는데.. 막상 글로 옮기려니 어렵네요
전 와이즈님처럼 많이 배우지도 않고 말을 잘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한번 속독으로 읽어본것이 전부이며 전도사님들과 상담도 수차례 해보았지만 교회는 다니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라옵건데 최소한의 단어만 사용하시고 되도록이면 성경의 말씀을 예를 드시고 간결한 문장으로 대답을 하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부끄럽지만 제나이 스물아홉이나 독서에 취미를 들인지 이제 이년 조금 넘었습니다. 그래서 아직 문장이해력이 부족하며 난해하거나 국문학논문에서나 봄직한 어려운 단어들의 태반은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님이 덧글을 단것을 보았는데 너무 이해하기 힘들더군요 저의 무지를 너그러히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너무 저를 낮추듯한 문체를 쓰는게 거북하시다면 이해하여 주싶시요 제가 와이즈님보다 나이도 어리고 문어체를 쓰는데 서툽니다.그리스 로마신화에 의심이 깃든마음에는 사랑이 자리잡기 어렵다라는 말이 있지요.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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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5월 19, 2006

다빈치코드(Da Vinci code)의 거짓됨과 기만성에 대하여

글을 씀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인기가 있다는 것과 또한 좋은 또는 옳은 것이라는 것과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인기몰이 사상(just as times books)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같아서 그냥 지나치려고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글을 씀에 있어서 몇가지 동기적인 측면을 고려할 때에 당위성을 느끼게 됨에 있어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신앙에 대한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거짓 사상이 마냥 그러한 것과 같이 오해되어지고 기만되어진다는 것에 대하여서 신앙적인 측면에서 분명한 답변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이 그 첫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일반 상식적인 개념에서도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으로 특정 집단 특히 우리 기독교에 대하여서 왜곡시키고 피해를 줄 수 있는 것과 같이 기만시키고 있다는 것과 일반 사람들의 상식적인 판단을 흐려놓는 가운데서 글쓰는 사람의 잘못이라고 함을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이 그 글쓴 자를 비롯한 오도되어진 편견으로 고통받는 자들에게 좀더 자유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부언을 더한다면 '다빈치 코드'의 합리성을 나타내는 개개의 문구와 입장을 비판하는 것은 기독교계 전반적으로 활발하게 표현하고 있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총체적으로 그것이 부정되었음에 대한 것을 그 합리성의 정당함이 부정되어 거짓이라고 함의 실체를 지적함으로 글을 한정지우도록 하겠습니다.


본론에 즈음해서

1, 기독교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사실이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다빈치코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표명함에 있어서 잘못이해하는 부분이 있음을 지적함으로 글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그만한 교회의 교육과 잘못된 것의 반영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과 같이 생각하거나 임의적인 기득권의 사수적 개념으로 일관하겠다는 맹목적인 어떤 피해의식에서 비로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는 것은 다빈치 코드라는 입장과 그것에 관련된 사상들이 하나님 앞에서와 일반 사람들의 보편적인 인식에서 본다고 해도 거짓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빈치 코드를 말하는 서양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들의 합리성의 무비판적인 표현이 가능한 '언론 플레이'들이 오히려 책망을 받아야하고 또한 미련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유럽 대륙의 합리성의 인식과 합리성이라고 하는것은 실재라는 개념을 전제로 하지 않은 가운데서 말하는 경향이 있고, 그들은 말할 수 있다는 방법 즉 'How'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합리성이 가능하다고 하면 그 실재의 여부라고 함을 말할 수 있다고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 특수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각 나라에 따라서 합리성이라고 함에서 실재라는 개념을 마음에 두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재고없이, 합리성에 비로소 따르는 실존에 대한 일방적 판단에 따른 사실성의 개연성으로, 그것도 실재도 아닌 것을 말한다는 것과 그대로 받아들여서 상업화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용납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더욱 특정 집단으로써 우리 기독교에 대한 왜곡을 의도하면서까지 말입니다.

만일 사실이라고 함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특정 집단(우리 기독교의 입장)에 피해를 주는 것을 상업화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법적인 소송이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그 다빈치코드를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기독교가 사실이라고 함을 어떻게 말할수 있는가 하는 것에서 부정적이라는 임의적 생각으로 자신들의 입장이 상대적인 보편성을 가질 수 있음에 대하여서 열려야 한다는 측면을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사실이라고 함을 말할수 있음을 인하여서(클릭 본문참조하세요) 그 특정 집단의 편견이라는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고 절대의 재가가 있는 절대의 보편성이 있는 증거적 사실이 성립되어지기 때문에 그 상대적인 판단의 범주에서 비로소 기독교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즉 다 상대적이라고 하는 측면을 강조하여서 그들의 입장을 추구하려고 하겠지만 그러나 형태적인 측면에서 상대적인 한 견해라고 기독교측을 편협하게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절대자의 보편성의 부여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는 최소한 그 개연성을 인정할 때에는 그 자체적 정당함까지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이 자존적 절대 보편성의 재가가 있다는 점에서 결국 상대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또한 상식적인 결론적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식적으로도 핑계못하는 복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2, 문학의 자유와 보편성에 대하여서

어떤 이들은 문학이라고 하는 것 '글쓰기'Writings'라고 하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것이고 허구를 다룰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실재의식에 국한해서 쓰일 필요성이 있겠는가 하는 것에 대한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이 역시 한정되어진다는 점에서 제한되어진 범위를 가지는 것으로써 정체성을 가져야하는 윤리성은 배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각주1)

그런데 데리다의 글쓰기와 같은 차연이라고 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규정되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니체의 '메타 해석 인식의 증식'이라는 것과 상관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성립되어짐에 대한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면 자유라고 하는 것을 방종으로 이해함의 당위성을 말하는 그런 안티적 자유의 모습을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즉 규정되어짐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과 그 규정되어짐의 실존이 없다는 것은 항상 동일한 사실로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상대적인 보편이라고 함의 자유라고 함에 있어서는 표현할 수 없다고 하여도 실존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한되어진 윤리적 사실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택스트를 해체함에 대한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상대적인 택스트라고 비로소 본다면 그것은 이미 잘못된 인식으로써 임의적 메타해석적 인식의 증식을 주장으로 자신들의 안티적 성경해석의 당위성을 말하고 있는 것밖에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은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따른 자신의 절대 주권적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으로 표현하였음에 대한 것을 상대적으로도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할 때에 그 자체적 정당함이 절대적인 것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함으로써, 그 택스트는 비로소 상대적인 범주의 사실적 판단이라는 범주적 판단을 비로소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의 재가를 받았다는 것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영감을 상대적으로도 온전하게 절대적으로 나타내실 수 있고 내셨다는 점에서, 비로소 상대적인 범주만으로써의 해석적 임의성은 그 가능성의 정당함을 따라 해체적 재구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실에 대한 강요적 인식을 구축하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다빈치 코드(Da vinci code)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임의적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개연적 사실로써 재구성된 것으로써 총체적 부정되어진 상대적 정당성으로써 자존적 절대의 보편과 정당함의 재가가 있는 상대적인 사실을 판단할 수 있다고 자신과 독자를 기만하고 있는 거짓으로써의 것밖에는 실존적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문학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그 발생적 학문의 기원과 상관성에서 볼 때에 그 상대적 보편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상대적 보편이라고 함의 판단 범위설정에서 한정된 경계선을 말할 수 없다고 하여도 그 경계선이라고 하는 윤리적 가치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상대적 보편의 참된 사실과 타당성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적인 판단의 범위에 있더라도 상대적인 개별적 특수성도 감안해야 함이 보편의식에 어울리는 것이고 그러한 가운데서 판단을 내림도 허용되어질 수 있지만, 신앙과 신학의 개별적 특수성은 그러한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이 그 가치와 사실의 취급에 타당성을 말할 수 있는 한정되면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인 자유함의 실제를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인 자기 계시를 하실 수 있다는 것과 계시하심으로써 자존의 절대의 보편성이 부여된다면 비록 형태적인 측면에서의 상대적인 모습이라고 하여도 비로소 동일한 상대적인 범주에서의 판단을 한다는 것은 잘못된 판단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것이며,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성에 따른 이해에서 상식적으로도 다빈치코드가 상대적인 안티적 합리성의 재구성을 가지고 비로소 상대적 해석적 당위성을 말하고 공포하는 매체를 선택한 것은 잘못이며 상대적일 뿐이라는 불가지론적인 개념에서의 타당성에 의한 기만적인 의지의 표현밖에 안되는 것임은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것이 다빈치 코드거짓기만인 것입니다.

특정 집단으로서의 우리 기독교에 대한 성립되어지지 않는 사실로써의 임의적 의지의 표현으로써 피해를 입혔다면 사회적인 법적 소송도 가능하고 또한 사실심리에서도 사실이성립되지 않는 안티적 다빈치코드의 반론의 사실들도 모두 기각되어진다는 것을 일반상식에서도 말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다빈치 코드와 그 아류의 사상들이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하여서 어떤 영광을 비로소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면서도 그 영광을 가리려고 한 미수적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인 사실로써도 판단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자의 글을 문학계에 '빅뱅'(big-bang)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폭'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물러나 빅뱅의 의미가 처음이라고 하는 어떤 개념을 수행적 모순에 따라서 인정한다고 하여도 그 파편들이 실재적인 의미를 가질 때에 그것이 성립이 되어질 수 있지, 이 다빈치 코드와 그 아류들은 그 사실의 실존을 정당하게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소실로 보게 되어지는 '자폭'이 어울리는 것임을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와 일반 사람들 앞에서 그 행한 것에 대한 법적인 소송적 입장에서 대응함에 동의하면서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심판하심에서 그 존재의 고민과 변명을 해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도록 주의 은혜가 회개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함께하시기를 기도하며 글을 맺습니다.





각주1) 문학과 철학의 상관성을 이해한다면 문학의 독립적 표현과 상관성이해에서 자유와 보편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포스트구조주의적인 개념에서의 글쓰기와 해체라는 것의 보편성은 일반적으로 데리다를 비롯한 자들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수 있는데 이들의 글쓰기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문학의 자유와 보편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한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별력이 없는 가운데서는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실 우상주의라는 반론이 있다면, 그 '사실우상'이라고 함의 인식적 판단이 이미 부정되어진 것이라고 함을 생각할 때에 그런 규정은 의미가 없음을 지적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처럼 데리다의 글쓰기와 같은 어떤 문맥적인 규정적 개념의 택스트를 해체하는 작업이라고 하는 것을 허락되어질 수 있는 허구와 관련되어서 우리의 삶에 유익할 수 있는 측면을 유도해내는 문학적 입장의 가치과 자유와 보편성을 일반적으로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정되어져야 하고 그것은 윤리적 판단을 받음에 전혀 합당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 문학이라고 함과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그 생성적 과정을 볼 때에 상대적인 보편성에 있어서도 한정되어진 보편성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요구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데리다의 차연의 철학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것은 니체의 사상을 해석하는 계보 가운데서 파생되어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독립성을 말한다고 하여도 비로소 절대적 분립의 독립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즉 상대라는 범주에서는 절대라는 것이 비로소 개념적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임의적 허용이라고 하는 것과 절대자의 자기 계시적 나타냄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전자는 상대적 절대라는 개념이 진정한 절대의 실재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후자의 입장의 당위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측면을 마음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적 보편이 비교되어질 수도 있고 한정되어질 수도 있고 그 제한적 범위를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은 쉽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즉 자연수의 집합은 유리수의 집합에 포함되어지고 그 유리수는 실수에 포함되어진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모두 무한집합이면서도 부분집합적 개념을 가지고 있고 연산이라고 하는 것도 제한되어진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집합론을 말하는 것은 이미 기호이론이라고 하는 것의 합리적 변증법이라고 하는 것과 문학의 논리라고 하는 것이 이러한 것의 영향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즉 형식논리학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논리적 개념과 순서쌍에 따른 경우에 따라 변증법적인 문학적 논리를 펼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문학의 자유를 위한 변명으로써의 논리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것과 같이 임의적 자유(freedom)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이면서도 자유(liberties)를 말하는 것으로 제한적 윤리와 상대적 보편이라고 하는 것에 따른 학문의 범주설정이 사실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욱 이러한 상대적인 보편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의 보편이라고 함을 의식해야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그 경계선이라고 하는 것을 표현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그 경계선이라고 하는 것의 실존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 사실이라고 하는 것의 실존이 자존의 절대자의 재가가 있다는 점에서 그 범주의 설정이해를 바르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요일, 5월 18, 2006

절대의 권위와 전문가의 권위의 개념인식부족을 지적하며

글을 아주 잘 쓰셨습니다. 하지만 몇가지 지적하겠습니다.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러셀이 의견과 진리를 말함에 있어서 그 차이를 지적한 바를 기억하는데 의견은 거짓되어질 수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사실을 말할 수 없다는 그러한 불가지론에서 님의 말이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냥 거짓일 수 있는 의견일뿐이라는 점을 인정하시는 것이 님의 입장에서 정직할 것입니다. 그리고 잘 나가다가 욕으로 마치는 것은 글쎄요.. 진정한 답변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량을 구하는 것으로써 해석해야 하는가요.. ^^ 전문가의 권위와 절대의 권위를 임의적으로 비교하여 말씀하시고 있군요.. 님의 말씀이 신의 절대의 재가가 있는 권위라고 할 수 있던가요 그렇지 않다면 님의 임의성은 객관성으로써의 사실이 성립되어지지 않습니다.


제가 말한 합리성 자체에서 그 정당함이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사실이 객관적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성립되어지지 않은 가운데서는 전혀 성립되어질 수 있는 가능성만이 있는 말뿐인 것으로 그냥 그렇다는 소리밖에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님께서 말씀하신 몇가지에 대하여서 지적함으로써 예의를 갖출 필요가 있겠군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인용하심에 있어서
제가 앞서 말씀드린 것으로써 칸트라는 그 전문가의 권위와 그에 따른 합리성과 자존의 절대자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따른 절대 권위와 그에 재가를 받을 수 있는 상대적 합리성이 비교가 되어진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그것은 아니라는 것은 생각하심이 이미 판단의 범위설정을 잘못하신 것이라고 함을 말하겠습니다. 칸트적 발상적 이해의 유비적 접근은 저의 접근과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으로써 수행적 모순이라고 하는 개념으로도 용납되어지지 않군요.. 상대방이 말하는 것에 대한 대화적인 개념에서의 인정은 하는 것이 담론의 윤리라고 함을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하의 글들은 이미 담론의 윤리적 개념도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임의적으로 말씀하시고 반론하시는 형식만 갖추시는 것은 전혀 합리적 이성의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제 제가 비록 님의 전제적 합리성의 모순을 가지고 말씀하심에 있어서도 그모습을 전제로 하는 것이 수행적 모순이면서도 담론적 예의가 된다는 점에서 몇마디 님의 말에 대한 판단을 함이 옳을 것같군요..


1, 칸트는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말씀을 하셨는데 님의 입장은 불가지론적 입장인데 불가지론에서 개념의 성립을 말씀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드립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칸트의 이런 말을 성립된다고 인용하심은 그렇게 옳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칸트가 말하는 상대적인 개념에서의 당위성을 얻게 되어지는 개념의 납득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한 가운데서 말한 것임을 기억할 때에 그 개념은 역시 상대적으로 맹목적일 수밖에 없고 다만 다른 사람의 동의적 차원에서 말한 것뿐이라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즉 절대의 보편성과 정당함이 부여되어지는 상대적인 것을 비로소 상대적인 것으로만 생각해서 동일범주에서 판단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말씀하심은 이 권위에 대한 임의적 발상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즉 칸트는 신앙에 대하여서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자입니다. 다만 신앙에서 칸트와 동일한 실재의식을 가지지 않는 가운데서도 동일한 표현이 가능하지만 그 역은 상당히 고려해야 할 점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2, "당신은 당신의 신에 대한 인식이 절대적인지 상대적인지를 어떻게 논증할 수 있는가?"

이것은 이미 앞에서 다른이와 논의한 가운데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더 말할 가치가 없는 것이지만 신인식의 절대적인지 상대적인지에 대한 논증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질문 자체가 성립되는가 하는 것을 말해야 그 답을 강요할 수 있는 당위성이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역시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논증의 성립이 되어지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말씀하심에 있어서 저도 표현적인 측면에서 동의하지만 실제적인 측면에서는 생각을 달리합니다.

그렇게 말함에 있어서는 논증이라고 함이 실제로 사실을 말할 수 없지만 주의 복음을 인식함에 있어서는 그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실재론에 입각한 실제론인데.. 그것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하지 않으시고 일반적인 인식적 차원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 근거를 제시함에 있어서는 글이 길어짐으로 링크하겠습니다. 여기입니다.

부언설명을 하면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이 그 자체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해석학에서 가다머는 권위라는 것은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취하여지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지만 상대적인 측면에서 비로소 말한다면 그것이 최대한 선일 수 있으나 상대적인 것에서 절대라고 비로소 말할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고자 할 때에 그 가다머의 권위 의식도 상대적인 합리성으로 제가 한 말에 당위성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인 것을 가지고도 절대적으로도 말할 수 있음과 그렇게 함에 있어서 상대적인 권위라는 형식적인 개념만 비로소 유비로 생각해서 비교판단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것입니다. 비교범위가 동일범주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몰러님은 전혀 비합리적인 비교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는 헤겔이 말하는 자충족해가는 발전적 개념의 자아의식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둡니다. 헤겔은 오히려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마음에 두지 않고 시작하고 있음을 그의 법철학강요에서 분명히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에 즈음해서..

기본적인 상대방을 이해하시고 자신의 입장에서도 충실하게 말씀하심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제가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은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헤겔적인 신관이 아니라는 것과 칸트의 개념언급이라고 하는 개념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그 선험적 개념으로 말씀하심은 전혀 저의 입장을 이해하시지 못하시고 비판하신 것입니다.

더욱 제가 말하고 있는 상대적인 것이 절대의 자존적 정당함을 입고 있다는 것을 말함에 있어서 왜 다른 사람만 상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는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느냐 이것이 이중적인 모순이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이것은 저의 합리론에 대한 이해하시지 않으심에서 님의 오해에 비롯되어진 것입니다. 상대적이면서도 구별되어진 것으로 절대의 재가가 있는 사실이 있음은 절대의 보편과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상대성의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것으로서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의 복음이 핑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증거는 상대적인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주의 말씀의 뜻하심을 따른다면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권세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임의적인 판단하려고만 하는 가운데 그야말로 불가지적 개념에서 최선의 전문가의 권위와 합리성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 자체가 자기 모순을 상대방에게 합당하지 않게 이입해서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 목 인식론적 상대주의 고찰(이중잣대 비판)

이 름 몰러

( 125.♡.23.2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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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은 인간(인간의 인식,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대해서는 상대주의를 적용하고, 신(신의 존재, 신에 대한 관념, 신이 보여주는 행동)에 대한 인식에서는 절대주의를 적용한다. 이명신씨가 늘상 하는 강아지 풀 뜯다가 지렁이 등뼈 씹는 소리들을 정리하면 모두 이러한 이중잣대에 귀착된다. 도대체 "신은 절대적 합목적성을 갖고 있다"는 헤겔식 발언(시비거는 분이 있을까봐 말하는데, 헤겔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명신이 한 말은 사실상 헤겔식이라고 할 수도 없는 짝퉁 헤겔이다) 자체가 상대적 인식이라는 것은 왜 모르는지...
물론 신은 절대적이라고 하며 나름대로의 선험적 명제론을 내세우지만, 그러한 신을 말하는 자신들이 신인가? 신을 다 아는가?

호교론자들의 상대주의는 정당성을 상실한 불공정한 규칙의 게임이며, 이중잣대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어떤 주장을 펼치다가 논리적 반박에 직면하면,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전제(이것은 참이다)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논리(논리학)가 절대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변호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상대주의를 살펴보자.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현상의 질서와 규칙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 자신이 또는 우리 마음의 본성이 그러한 질서와 규칙을 만들어 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것을 자연 안에서 결코 발견하지 못랬을 것이다." - 칸트 『순수이성비판』

러셀은 칸트가 데이빗 흄의 태클, 즉 회의주의 때문에 기나긴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 3대 이성비판서를 작성했고, 그 이후 다시 독단의 잠으로 빠져들었다고 비아냥댔다. 다시 말하자면 이성비판서 이후에 나온 칸트의 저작들이 그리 보기 좋지 않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은 무지하게 어려운 3대 비판서를 보다가 지쳐서 러셀의 평가를 그냥 받아들이기만 할 뿐이다(나도 그렇다). 다시 말해 "순수이성비판"이 흄의 회의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집필되었다는 사실을 "믿고" 만다. 그러나 여러 철학자들의 공통된 해석들은 비록 칸트가 동의할지 여부는 미지수지만 우리가 차용해 볼 수는 있겠다.

어쨋거나 "순수이성비판"의 전체적인 경향은 그렇다 하더라도, 일부 chapter나 paragraph는 여전히 칸트가 독단적이며, 회의주의에 적절하게 반론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 많다. 위에 인용한 인식론에 대한 문장이 그 한 예다. 이명신씨가 즐겨 칸트를 씹는 대목이기도 하다(예전 게시판이나 기비평 까페를 뒤져보면 이명신씨의 찬란한 역작 "칸티안의 후예들에게"라는 글을 볼 수 있다). 각설하고...


사실상 위에 인용한 문장 등이 근대적 상대주의의 시작이라고 간주되고 있는데,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평가되는 니체보다도 수십 년 앞서는 것이다. 상대주의도 여러 유형이 있다. 이중에서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모든 진술이 배경과 전제조건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가치판단이든 가치중립적 판단이든 간에 모든 판단의 진위가 상대적이라는 입장을 가진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판단의 진실성을 담보해주는 객관적 기준 따위는 없다고 보고 있으며, 그 원인은 언어의 애매성, 개개 지각의 불일치 및 한계 등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형태의 상대주의도 객관적 준념, 즉 개념의 틀이 없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먼저 칸트가 이성비판을 집필하게 된 동기가 된 회의주의의 기본개념은 "나의 지각"이 과연 "저기 저 바깥"에 있는 사물을 정확하게 재현하는지 잘 알 수가 없다는 입장이다. "내 지각을 제쳐두고" 그 사물을 직접적으로 알아 볼 방법이 없다는 문제에 대해 칸트는 "마음이 수동적인 지각자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경험의 세계를 구성하는 구성자"라고 주장하며 회의주의를 극복하려 하였다. 만약 시각적 흐름을 해석해 주는 인식 구조가 없다면, 순간순간의 규칙성은 사라지고 그 어떤 사물도 지속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아예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격한 의견도 있다). 그래서 칸트는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고 하였다.

칸트의 이러한 시도, 즉 지각에 대한 마음의 기능을 재해석한 결과는 회의주의를 극복하는 효과는 거둘 수 있을지 모르나 극단화된 주관주의로 흐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결국 지식과 진리는 지각자 각각의 입장이나 해석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인 것이 되고 만다. 물론 칸트는 지각자가 의식을 일으키는데 몇 가지 공통적인 기본 지침, 다시 말해 개념의 틀을 따른다고 하였지만, 여기에는 객관적으로 타당한 방법이나 기준이 없다. 어떤 방법이 다른 방법보다 더 낫거나 나쁠 수는 있지만 말이다. 물론 이마저도 과격한 상대주의자들에 의해 부정된다.

여기에서 상당수의 유신론자들은 신이나 악마가 개념의 틀에 의해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는 신을 포함하는 개념의 틀이 신을 배제한 개념의 틀 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다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란다. 나아가 우월성이나 열등성을 판단하는 비교평가 기준조차도 없다는 인식론적 상대주의자들의 주장을 인용한다. 우열을 가리는 것, 즉 개념의 틀에 대한 등급이나 서열을 매기려면 합리성이 바탕이 되어야 하나 그런 기반은 없으며, 합리성은 이미 개념의 내부에 들어 있기에 중립적인 합리성은 없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상대주의는 여기에다 "모든 관점이 타당하다"는 주장을 덧붙인다.


여기에 대한 반론은 여러가지가 있다.

"객관적 외부세계"란 인간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세상이 있다는 것이며, "진리대응설"은 어떤 진술의 참됨은 마음과 상관없이 세상의 참된 사실과 일치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는 것이 인식론적 절대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여기서 객관적 외부세계를 부정하면 관념론자가 될 것이며, 진리대응설을 거부하면 인식론적 상대주의자가 된다. 인식론적 절대주의자들은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반대하여, 사람들의 의견 차이는 있겠지만 그런 차이가 객관적 외부세계에 대한 인정이나 진리대응설과 불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유신론자들은 객관적 외부세계를 부정하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신이나 악마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

다른 반론은, 모든 관찰에 이론이 개입된다는 주장은 받아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관적 진리밖에 없다는 주장"은 거부한다. 물론 유신론자들도 여기에 동조하기는 하지만, 이들 중 일부는 인간의 일은 모두 주관적이며, 신의 일은 객관적 진리라고 주장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서두에 말했던 불공정한 게임을 하는 것이다.(이명신이 말장난을 하는지 정말로 언어장애가 있어 그런지 모르지만, 끈기를 가지고 그의 주장을 해석해 보면 결국 이중잣대에 불과한 주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효과적인 반론은 인식론적 상대주의의 주장들이 실은 상대주의를 스스로 부정한다는 지적을 하는 것이다. 상대주의의 주장대로 모든 판단이 상대적인 것이라면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타당하다"는 판단의 진리 자체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마치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는 어느 크레타인의 발언이 모순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또한 이를 일부 유신론자들의 주장에 적용해보면 서두에 말했던 것과 같은 것이 된다.
"당신은 당신의 신에 대한 인식이 절대적인지 상대적인지를 어떻게 논증할 수 있는가?"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부정하는 증거(?)는 역설적으로 상대주의가 씹어대고 있는 과학이다. 인식론적 상대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적 탐구의 결과가 과학자의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인식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현대과학의 성공은 그 주장을 무색하게 한다. 물론 과학(과학자)이 항상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객관성과 재현성, 그리고 반증가능성을 앞세운 과학은 "인식론적 상대주의가 전적으로 타당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한 가지 말해 둘 것은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은 그 출발에 있어서 상대주의의 방법을 차용하고 있으나, 주관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개개 관찰자의 객관적 관찰의 결과가 상대적인 것일 뿐이지 주관적 인식을 바탕으로 상대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종교인들은 신의 절대성에 비해 과학이 상대적인 지식에 불과하다면서 인간과 과학을 폄하한다. 이런 현상들은 오해의 결과가 아니라 무지의 결과이다)
빛의 속도가 초속 29.9790...만 킬로미터라는 것과 개개 관찰자의 운동상태에 관계없이 일정하게 관찰된다는 사실, 모든 물체는 별도의 항력이나 추력이 없는 한 땅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정확하게 말해서 모든 물체는 인력을 가진다는 사실), 속도가 증가하면 질량(무게와 개념이 다르다)이 증가한다는 관찰 등에는 상대주의가 끼어들 구석이 없다. 도대체 객관적 진리 따위는 없다고 주장하는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과학적 탐구가 무엇을 지향한다고 보고 있는 것인가?

과학적 견해들과는 상관없는 분야에 대해서도 인식론적 상대주의가 항상 타당한가 하면 그렇지 않은 구석이 많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자신들의 논리적 근거로 "모든 이가 옳다"는 것을 들고 있고, 또한 서구적 방식만이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는 그 성과들을 근거로 하여 상대주의가 똘레랑스와 자유주의를 표방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철학적 이론이 바람직한 결과를 불러왔다는 점을 근거로 그 이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며, 또한 상대주의가 자유주의적 특성을 갖고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상대주의적인 똘레랑스의 심각한 결점은 상대주의나 그 해석의 어떤 결과들 중에는 분명하게 유쾌하지 못한 것이 있다는 점이다. Ku Klux Klan 단원이나 슈퍼맨의 호적수 렉스 루더도 나름대로 자신의 개념의 틀 안에서 옳은 행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인종차별주의나 세계정복을 바람직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인종차별주의 같은 것은 타인에 대한 문제이니 그럼 개인의 문제에 국한된다고 볼 수 있는 것도 살펴보자. 종교적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을 예로 들면, 그들의 행동은 먼저 인간(생명)의 가치를 격하시키는 결과를 불러왔으며, 과학(의학)에 대한 부정으로 인간이 누릴 혜택을 거부하거나 박탈하려는 시도를 한다는 점이다
(과학을 비판하는 종교가 많지만, 아미쉬 이외에는 과학을 비판할 자격을 가진 종교가 없다. 많은 국가에서 발행되는 파수대가 맥킨토시 전자출판 프로그램으로 작성되어 배포된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고 해야할까? 비웃어야 할까?)
피를 먹지 말라는 계명을 내려준 신의 의도(사실은 문화/문명적인 이유 혹은 위생적인 이유에 의한 율법일 뿐이다. 동물의 피는 쉽게 변질되고 또한 배탈을 유발하기 때문에 못 먹게 한 것이다)는 생각하지 않은 채 무조건적으로 수혈을 거부하는 행위를 과연 관용의 범주에 넣어 "네 맘대로 하라"고 하면서 방치해야 할 것인가?


권력의 횡포, 권력의 타락이나 사회의 분열과 전쟁을 막아주는 것은 상대주의적 똘레랑스가 아니다. 오히려 각자가 상대방에게 똘레랑스(이때는 관용보다는 양보의 의미)를 강요하며 분쟁을 조장할 뿐이다. 독도문제에 대한 일본 지도자들의 망언을 보라. 자유주의적 똘레랑스(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맘껏 자유를 누림)가 근/현대 민주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지 상대주의적 똘레랑스가 자유주의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어떤 개념의 틀에서는 참이지만, 다른 개념의 틀에서는 거짓일 수가 있다.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그 자체도 상대주의적 비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상대적이지 않은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상대적인 것"에 대해 상대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절대적 존재가 존재함을 상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상대적이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기가 지난하고, 아예 인식조차 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절대적인 존재가 무엇이며 어떤 것이라는 것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인식론적 상대주의든 인식론적 절대주의든 간에 말이다.

함부로 절대성을 가진 존재가 주는 축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설명이나 설득도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존재가 주는 축복을 누리기 위해 어떤 바보짓도 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런 축복을 반대하거나 회의하는 사람들에게 분노나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그들은 절대로 자신의 인식결과가 상대적임을 말하지 않는다.
이런 자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여전히 한 가지밖에 없다.


"조까~"





독단과 협잡을 거부하며~


작성시간 : 2006-04-29 11:41:47


http://geocities.com/vosscare

글쓴이

일요일, 4월 30, 2006

글쓰기와 비평에 대하여

글을 씀에 있어서: 글을 읽고 비윤리적으로 대중을 기만하는 반기련을 비롯하여 안티적 입장의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예의라고 하는 것과 글을 씀에 있어서 개인적인 입장을 이해하지 못함에 따라 아니 이해하지 않으려고 함의 정직함이 결여됨에 따라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글쓰기라는 것에 대한 견해의 차이는 보편적으로 말한다면 문학과 철학이라고 함의 차이로서 말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에서 공부하신 박이문교수의 문학과 철학이라는 것의 개념구분적 차이의 가능성에 대한 재고를 위한 글을 쓴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 문학과 철학이라고 함이 사상의 전달에 대한 회의적 개념의 동반으로 인해 재구성이라는 도구적 개념만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각주1)

이러한 것은 사실 비평이라고 함의 양식이라고 하는 것이 공허하고 아주 비윤리적 극단을 달리게 하며 기만적 요소를 위한 마키아벨리적 개념으로 자리매김되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요소는 말의 내용이라고 하는 것보다도 말의 표현 기법을 우선시하고 있는 것으로 이것은 실재의식이나 실제의식과 같은 것에 대한 개념을 배제한 자들의 기본적인 입장이며 학적으로는 니체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데리다와 그에 따른 미국의 예일학파의 영향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각주2)

앞서 비윤리적 개념이라고 함은 그 글을 쓰는 자의 실재의식이라고 함을 문학에서는 전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의 딜레마에서 임의적 자위의 '놀이'를 하고 있는데, 사실 철학적 글쓰기나 사상의 표현에 있어서는 그 글쓰는 자의 기준으로써의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의식이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는 것으로써 비인격적인 비판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극단적이라고 할 때에 있어서는 그 글쓰는 자의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의식을 간과하는 가운데서 그 표현적 입장을 임의적으로 해석하고 자의적으로 재구성하여 말하는 소위 어떤이들의 '사료분석'이라는 표현들이 지나친 것으로 모자람에 이르는 비평으로 나타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버틀란트 러셀도 자신을 비평할 때에 학식이 있고 걸맞는 사람이 비평해줄 것을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모르고 간과하고 글쓴이에 대한 폄하에서 그 합리성에 대한 기본적 이해의 몰락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그는 의식해서 말했던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암튼.. native에게 그 자신의 나라를 공부하라고 말함에 있어서, 순수한 입장의 표현이 되어질 수 있지만 대부분 비난적 개념의 폄하적 입장을 가지고 말한다고 하는 것은 앞서 말한 글쓰기와 비평에 대한 맹목적 신뢰나 또는 개념없는 막연한 불안감이나 두려움에 따른 어리석음의 표현일 것입니다.

글쓰기와 비평에서도 그러한 보편적인 인식의 경향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함이 글쓰는 사람의 인격이 되어질 것이고,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 행하는 자들은 그러한 것을 가지고 기만하려고 하는 자들의 맹목적 추종자들로서 자기 기만적 추함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어리석음을 자초할 따름인 것입니다.

프랑스에서 한 문호 사르트르.. 그나라 국민들은 한때.. 사르트르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그러한 생각을 할 정도로 그를 신뢰했는데.. 사르트는 정작 그의 글쓰는 것에 있어서 글이 틀린다는 것에 대하여서 그렇게 신경쓰지 않고 그것을 고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글이 아니라 글의 내용이라고함을 말했음에 대하여서 프리드리히 빠제는 말하고 있음을 기억합니다. 그 문호의 인식을 지금도 계승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여기서 가릴 것은 아니고 좀더 보편의식에 대한 개념도 없이 글쓰는 것으로 비난하는 어리석음은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각주1) 서양사에서 세 악동으로 불리고 있는 자들 중에서 프리드리히 니체의 허무주의적 개념의 발상은 현실을 위한 창조적인 개념으로 해석되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니체에 대한 해석의 한 경향일뿐 그의 허무주의적 개념이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있게 되어지는 모습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의 경향은 글씀이라고 하는 것의 실제의식이 없는 가운데서 그 방법론적 개념으로서의 논리적 개념이 중요한 것으로 자리매김되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프랑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것입니다. 그들의 정서는 실증주의적 개념이면서도 그 실증주의적 개념이 어떤 실재적 개념에서의 실증을 말하기에 부적절함을 인식한 나머지 방법의 실제성을 재구성하는 'How'의 입장을 상당히 중요시 하는 합리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각주2) 데리다와 예일학파라고 하는 책을 볼 수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미국에서의 그 데리다의 인기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프리드리히 빠제라는 사람은 그의 유쾌한 철학이라는 책에서 조소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꼬리말

글쓴이 반기련을 의식하고 글을 썼습니다. 그 만난 20대 30대 젊은이들의 입장이 날카롭고 보편적인 지식을 갖춘 것을 보면서 참 기본적인 학문적 입장을 취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비난하는 모습을 보고 실망이 들더군요.. 00:17


글쓴이 반기련에서는 저의 글에 대한 분석이라고 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 글못쓴다고 하며 자신들이 저의 말을 재구성해놓고 웃고 있는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저의 대한 실재와 실제의식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한 가운데서 말입니다. 00:19


글쓴이 그리고 여러 나라 사상들을 읽고 생각할 때에는 그 이질성과 동일성 그리고 유사성과 인용함에 대한 가능성등을 생각해야 하는데 전혀 그러한 것없이 퍼오기도 하고 인용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참 답답함을 느낍니다. 00:20


글쓴이 인터넷의 영향으로 외국을 소개하거나 그곳에서 되어진 일들을 소개하는 각 기자들의 입장에서도 상당히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개인적으로 유감이고 또.. 반기련의 몇몇 철학적 입장이 견고한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을 기만해서 글쓰기와 비평을 외곡하고 회원들을 기만하는 경향이 있는 것에 대하여서도 유감이군요 00:22


글쓴이 상대방이 얼마나 배웠는가 하는 학력에 대한 맹목적 판단으로 그의 말을 임의적으로 무시하는 소위 '너 얼마나 배웠어 배우지도 못한 것이 잘난척하네..'이런 입장에서 그 말하는 사람의 말을 맹목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학원정도 나오면 뭐 더 배울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00:24


글쓴이 불가지론을 넘지 못하는 한계상황에서 학력에 대한 화려한 메달리스트들의 꿈은 실제적이지 못하지요..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 맹목적 메달리스트들의 화려한 비평은 참 가증스럽기 짝이 없지요.. 00:26


글쓴이 아 개인적으로는 더 공부한 사람을 존중하고 배워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맹목적인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지요.. 물론 불가지론을 넘을 수 있는 가운데서 참고한다면 더 많이 공부할 수 있고 더 많이 연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00:27


글쓴이 글쓰기와 비평.. 맹목성과 개연적 두려움이 놀이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00:29


글쓴이 그간 저의 글에 대한 여자적 해석으로 놀이를 하신 분들에 대한 저의 답변입니다.


http://geocities.com/vosscare

글쓴이

반기련이 이해하지도 답변하지도 못한 글

합리성의 당위성에 대하여서

설명: 반 기독교연합회, 반기련에 올렸던 글입니다. 글을 쓸 수 없도록 해놓고 반론도 하지 못한 가운데서 근거없이 비난도 하고 있기에 어떤 글을 올렸는지에 대한 표현이 있어야 할 것같아서 저의 글을 올립니다.


안녕하세요..
개인적으로 자주 찾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다른 안티안의 글을 우연히 보았는데.. 그러한 글이 저의 언급과 비교되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이해하지 못한 부분의 오류와 판단에 유익을 위해 글을 써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는 무뇌라고 하는 말을 두려워하는 합리성을 추구하는 가운데서 비판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해하지 못한 비판의 글이 있어서.. 저의 입장에서는 분명함을 말하고자 하고 위하는 측면에서는 이성없는 비판의 목소리를 통해 안티안들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을 가려주기 위함입니다.

뭐.. 안티안들의 보편성이 이미 왜곡되어지고 편협하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지만 너무 맹목적이고 피상적이라는 점에 부끄러움을 그래도 감추어주고 바르게 가르쳐주는 것이 회원으로서 기본적인 입장이 될 것 같아서 글을 씁니다.

안티안의 싸이 페이퍼에서,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 성부하나님 자신이심을 말하였음을 지적하면서, 공자나 석가들이 먼저 온 자들로서 예수님을 쫄병으로 묘사하는 그 선취적 개념의 권위로 비웃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한마디 해두었는데.. 반기련에서 한마디 해두는 것이 좀더 분명하게 말하게 되는 것일 수 있어서.. 말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것은 그 하나님이 자존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자신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그 이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심에 있어서 상대적인 측면에서는 그것에 대한 비판의 정당함을 스스로 그리고 절대로 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합목적성의 시비와 그 이하 합리성의파편적당위성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존적 절대 정당함이 있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합리성의 실존이 항상 예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상대적인 판단과 비판을 가능하게 한다고 해도 비로소 판단을 받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인 언급을 하면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말'은 그 판단이라고 하는 인식의 계기로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것이며 오히려 그것을 주장하여서 말씀하심에 자기 정당함을 절대적으로 취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한번 웃는 것과 같은 것으로 예수님이 다른 성인들의 나타남 뒤에 왔다는 것으로 그 권위적 실존의 정당함을 부인하고 조소하는 것은 이미 합리성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즉 합리성의 인식의 계기인 시간의 개념에서 비로소 사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신학과 철학에서 철학의 개조와 변형을 말하고 있고 또 수행적 모순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여서 전제되어질 수 있는 필요의 모순은 대화를 위한 것으로 인정하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것이 절대자에게 요구되어질 수 있는 사실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펠의 윤리적 담론에서 말하고 있는 수행적 모순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 상대적인 정당함의 여지를 변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절대의 개념에 대하여서는 당위성을 스스로 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간에 대한 권위.. 옛 가톨릭에서는 터툴리안을 비롯한 자들의 '취득시효'라는 개념에서 먼저 되어짐에 대한 것으로써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수행적 모순이라는 것의 당위성에서 납득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고 그러한 노력을 하겠지만 기독교에서는 시간의 개념의 판단에서 비로소 실존적 정당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시간이라고 하는 것의 인식의 사실에 대하여서도 그것이 절대자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시간의 실재적 정당함을 입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임의적 시간관을 가지고 상대적인 일반 역사의 시간관을 비로소 생각해서 예수님에 대하여서 돌을 던지는 자의 모습은 인식의 모자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시간관과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시간의 상관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시간의 실존이라고 함을 재고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역사적 예수님의 실존을 비웃는다면 그야말로 인식의 계시로서 시간의 개념이 없는 자의 어리석음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시간의 실존과 개념이라고 하는 것에 사실성을 분명히 하지 않는 가운데서 비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그러한 역사관으로 예수님의 실존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을 말해두겠습니다.

그리고 더 분명히 말하게 되는 것은 삼위 일체로서 예수님은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의 자기 계시라는 점에서 그 실존적 정당함을 스스로 절대적으로 취하시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합리성으로써 비판함에 모든 합목적성이 재가를 받지 않은 한 그 정당한 실존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부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심에 대한 것은 그냥 맹목적인 전제가 아니라 그 역사적인 순서적 실존적 권위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계시적 증거임을 말해두겠습니다.

인식의 계기로써의 시간의 개념에 대한 철학과 신학에서의 많은 노력들이 있는데 그러한 것의 합리성의 아름다움은 있으나 그 실존적 정당함은 여전히 부재하며 그것을 위한 상대적인 합의에 전전긍긍할 뿐이라는 것을 말해둡니다. 그것은 세상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정체성이 그 실존을 말하지 못해서 불가지론을 넘지 못하고 허사의 경영의 아름다움으로 위로를 삼아야 하는 슬픈 현실이라고 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들의 실존적 정당함을 부여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진정 이성의 실존을 말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 지혜의 근본이신 구주이신 예수님을 믿으시길 바라겠습니다.








글에 대한 상황설명:


안티기독교에서 예수님을 비하하는 만화가 있었는데, 그것의 내용인 즉,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 자신임을 인정하면서도 역사적으로 공자나 석가가 먼저 왔다는 것을 통해서 실존을 비교하고 있고 비교 폄하하는 것으로 예수님을 군대 신참으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역사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비로소 실존적 비교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늦게 오심의 모습은 있으나 자존하시는 하나님 자신으로서 역사이전의 역사를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역사라는 시간의 순서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에 대한 인식의 결핍이라고 하는 것이 잘못된 비판을 낳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글입니다. 그러한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반 기독교 연합회 회원으로서 그 글을 올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대로 된 비판은 없고 비난하고 있고 글을 쓰는 것을 제한하는 가운데서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어서 저의 입장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같아.. 이글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글의 동향과 저의 입장 :


반기련에서 비판의 내용은 이 글에 대한 직접적인 글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없고 하나님을 증명하라고 하는 것에 대한 요구였습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저의 요구는 증명이라고 하는 것이 실존을 말할 수 있는가 라는 반문을 했던 것입니다.

증명하라는 그 말이 성립이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였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맹목적인 증명요구를 하더군요 그리고 하나님의 부존재에 대한 증명을 하라고 하니까.. 그것에 표현을 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증명이 실존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야 그들의 요구와 답변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고려하지 않은 가운데서는 그들의 기독교 비판의 증명의 사실들과 그들의 모든 합리성과 방향은 정체성을 잃은 것입니다.


반기련에서 기독신앙에 대하여서 이해하지 못함에 대하여 그것을 지적했는데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서 비난하고 있고 가끔 저의 블로그에 와서 가명으로 욕을 하시는 분들이 있군요.. 그래서 무슨 글을 올렸는지에 대한 답변이 있어야 할 것같아서 재차 글을 올립니다.


이해하지 못했다고 함은 그들의 인식의 계기로서의 시간관이라고 함이 정당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정당하지 못한 시간관으로 인한 역사인식은 주님의 역사적 증거를 비로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부정된 인식의 계기로서의 시간관에서는 답변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참고: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증거와 사실에 대하여서
반기독교 선언문에 대한 답변

화요일, 4월 18, 2006

반기련운영자 유령의 비윤리적 이성에 대하여서..

반기련운영자 유령의 비윤리적 이성에 대하여서..

제가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도 임의적으로 박탈하고 대화중에 차단하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존재한다고 하는 자가 존재를 입증해야 한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말을 하고 있고 또.. 내가 어떤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지 전혀 상황파악이 안되는 것을 봅니다.

저는 기본적인 입장이 증명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증거라고 하는 것을 입장을 삼고 있고 그것이 핑계치 못할 상대적으로도 납득 당위성을 자체적으로 비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글은 이것입니다.

그리고 존재에 대한 부재를 증명하라고 한 것은 신에 대한 존재증명을 다른 이가, 구체적으로 밝히면, 반기련의 회원이신 신중해님이 주장했고 그것에 대하여서 부당한 것임을 말함에 있어서 '증명이 실존을 나타낼 수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직접적인 참여도 하지 않고 나중에 저의 한 말을 가지고 과잉반응하면 상황판단을 하시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비난도 비판적인 당위성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 있어야 하는데 이런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사람이 반기련의 운영자로서 반기련이 비 윤리적 단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게 되는 강요를 스스로 취하고 있음을 봅니다.

아래는 저에게 전혀 개념없는 가운데서 맹목적으로 비난한 내용입니다. 기본적인 윤리시비를 위해서 분명히 언급할 필요가 있어서 글을 올립니다.


반기련에 올렸던 저의 글에 대하여서 반론을 하지 못하게 하고 비난한 것에 대하여서 제가 저의 입장을 밝힌 글입니다.

http://sophiadei.blogspot.com/2006/04/blog-post_15.html

이후로 저의 글에 대하여서 분명하게 반론하시고 윤리적 예를 갖춘 글을 쓰실 수 있는 인성과 역량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반기련에서 존재증명에 대한 시비를 읽을 수 있는 상황리플은 여기를 참고하세요
http://cafe.daum.net/gloriadei 에서 지성 토론방 26번 글입니다.
운영자 유령님은 참석하지 않으셨고 심술해님이 먼저 증명에 대한 이야기를 함에 있어서 제가 그 반문을 했던 것입니다. 상황적인 것을 고려하지 않고 내가 한 말만 임의적으로 인용하신 것은 의도성을 임의적으로 조작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유령(손님)

==이명신의 리플===
이제 증명은 유령님이 하실 차례입니다.
신이 없다는 것에 대한 증명을 하세요..
반박할 수 없을 절대적인 것이나 절대의 재가가 있는 것으로..
그리고 그 증거적 증명이 안되면 안된다는 것에 대한 비판적 글을 올리시고
제가 그것에 답변할 수 없을 때에 님의 입장을 확증하도록 하심이 좀더 공정할 것입니다.
님의 증명도 기다리겠습니다.
=== 나의 답변===
내가 처음부터 말했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자가 존재를 입증해야하고, 상대방에게 부존재를 증명라는 파렴치한 짓은하지 말라고..
그런데도 나에게 부존재를 증명을 요구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가르쳐 주지.
"너는 너의 어머니가 지나가는 똥개와 수간을 해서 너을 임신하고 너를 낳아다.
그래서 너는 인간이 아니고 개새끼이다."
부존재를 증명해봐라 그럼 내가 야훼의 부존재를 증명해주지.
예상되는 답변에 유전자검사니 뭐니 나오겠지만........
개새끼의 유전자도 내가 변개시켜서 인간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러한 헛소리는 부존재 증명이 되지 못한다.
야훼가 있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는 증거를 가져와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함부로 존재하지 않는 야훼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상대방에게 입증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는
너의 파렴치한 행위로 인해서 너는 개새끼가 됐으며,
네가 개새끼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 하기전에는
앞으로 너와 내가 만나는 곳에서는 언제나 너는 개새끼로 호칭될 것이다.
그리고 너로 인해서 너의 어머니는 수간으로 너를 잉태한 개년이 되는 것이다.
2006-04-18 (tue) 1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