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마디 비명에 대하여..
상대방이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에는 동정적 입장에 설 수도 있는 것이 인지상정적인 것으로서의 당위성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에서도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분별을 왜곡함이라고 하는 것이 결코 분별력을 갖추지 못할 때에 이어서 그 악함의 전혀 반성적 입장이 있을 수 없다면 그러한 동정적 입장의 당위성도 존립할 수 없는 것이 당위성을 얻게 된다.
몇마디 '비명'에 해당하는 것에 대하여
1,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어원적 고찰에 대하여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어원적 고찰은 임의적 어원고찰이라는 개념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카드어로의 표기되어진 어원적 분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가능태적인 실제론에 따른 인식론적 존재론으로서, 이미 자체적 존재의 정당함을 정당하게 스스로 취하는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계시를 비로소 판단함의 사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카드어적 어원적 실제라는 개념은 임의적이라는 가능테의 당위성을 정당함의 근거로 삼고 있는데 그것 역시 상대적 정당함으로서 자존의 절대 정당함을 비로소 판단함의 정당함을 비로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합리적 가능성의 정당성이 존재적 가능성으로서의 정당함을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상대적이나마 전통적인 측면에서의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인식론'이라는 것이 비판받아왔지만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모순조차도 판단할 수 없는 자존의 절대자의 신실성은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적인 측면의 여지로서의 보편성을 띠는 하나의 가능태로서의 합리적 존재적 근거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며 판단 가능하다고 하여도 그것의 정당함은 이미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으로서의 그 성립가능성으로서의 합리적 당위성도 그 행방을 그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이 된다. 한마디로 근거없는 뜬 구름을 잡는 헛된 소리로 사람을 기만하는 사실로 전락할 뿐이다.
2. 불가지론을 주장할 자격에 대하여서
이미 합리성에 대한 행방의 실존을 말할 수 없는 안티적 개념에서는 이런 언급조차도 그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수행적 모순이라는 개념에서 발언적 입장을 전제해본다면,
먼저 인용한다면
기독교는 "절대주는 기독교의 여호와다" 라고 주장을 하려면, 그것을 보조할 객관적인 이론이 성립되어야 할 것이며, 기독교를 믿을 믿음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죽어버린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해명해내야만 할 것이다. "기독교에 들어가 보았더니 그곳에 절대주가 있더라","기독교의 여호와를 믿지 않으면 모두 지옥에 가야만 한다" 라고 주장하려면 위의 모순점에 대해서 반드시 해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 적그리스도, 닉네임, 반기련 -
답변
개념이해가 안되고 있다. '절대'라는 개념은 상대적 여지에서 고립되어진 것으로도 이해되어질 수 있고 또한 상대적인 것과 달리 고정되어진 것으로서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옥스포드 사전에서 별반 다름없이 정의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 '절대'라는 개념이 신의 속성적 개념이라는 것이 이미 전제되어진 상태이며 신의 실존이해에 따라서 구별되어진 속성으로서의 절대의 개념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즉 절대라는 개념이 무슨 보조개념이 있어야 한다는 상식에도 납득되지 않을 소리를 하고 있는지 너무 비상식적인 발언을 하고 있음에 식상하기 그지없다.
정말 상식적으로도 사고되어질 수 있다면 신의 속성으로서의 절대라는 개념이 구별되어진 것이며 오히려 옥스포드의 개념과 철학적 개념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는(각주1) 철학적 개념들을 구별하여서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역으로서의 개념은 항상 성립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각주2)을 기억할 때에 모순이라는 개념적 임의적 규정은 그 글을 쓴 자의 잘못된 인식의 의지적 표현일뿐 객관성을 이미 잃은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한 임의적 주장의 당위성에서의 해명요구는 기각되어지는 것이다.
기독교의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의 증거에서는 그러한 상대적 모순이라는 개념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면서도 상대적인 모순적 입장의 것을 구별하여서 증거하실 수 있음에 대한 당위성은, 절대 자존적 정당함을 취하시는 분으로서, 그것을 스스로 취하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인 여지가 있는 것을 가지고도 절대적으로 합당하게 말씀하실 수 있으며 예수의 증거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인 형태를 가졌음에도 그의 증거가 절대적인 이유는 그의 신실함으로서의 이 이유에 근거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고 하여도 신이라는 존재가 이성적 판단의 범위에 한정된다면, 속된 표현으로 부인할 수 있다면, 신일 수 있는가? 상대적인 판단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입장이며 입증자료 청구라는 어리석음이 무색하지 않은가?
3. 근본주의라는 표현에 대하여서
개념없는 질문의 사도가 되기를 요청한 니체의 합리성의 화려함을 보아주어서 수행적 모순으로, 전제적 글을 쓴다는 것에 인내의 한계를 말할 수 있을 것같다.
비판의 성립되지 않음은 근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근본적 비판을 위한 근본적 소제선택에서는 실패한 인식구도에 자기 모순적 입장인 것을 지적할 수 있겠다. 예수불신 천당 지옥을 외치던 선구자(?)들이 그 내용적 입장에서는 합당하지만 표현기술적 입장에서는 연약함을 지니고 있음은 현대에서 재고할 수 있는 것임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그가 기술한 그것에서와 같이 표현적 기술이라는 형식적 방법으로써 내용적 실제의 사실을 비로소 근본적으로 비판함의 당연함을 근거지울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 그들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또는 기독교의 본질적 왜곡을 해서 재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른 분별에 있어서 전도의 양식의 변화와 지혜라는 것을 좀더 더욱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지 본질이 잘못되어서 재고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방법은 달리할 필요성이 있지만 그런 방법들을 통해서도 선히 역사하시길 기도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신앙의 근본의 보편적 이해의 기본적 전제를 모순적이라도 하고 비판을 하는 것이 상식적인 예의를 갖춘 자의 모습이 되어질 것이다.
4.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에 대하여
형태적 유사비교라는 개념에서, 특히 임의적 종교개념에서 즐겨 비판적 사료를 내놓는 경향이 있는데, 중요한 것은 유사비교라고 할 때에도, 인식의 동일범주라는 개념에서 가능성의 따른 당위성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부여할 수 있다. 그러한 개념없이 유사비교라고 하는 것은 그 사유의 행보에 있어서 '엉뚱하다'는 판단의 당위성이 따라온다는 것은 기본적 상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유에 있어서의 범주의 설정이라는 것이 그 실재론에 따른 실제의식에서 규정되어지는 것인만큼 실재론에 대한 개념이 불분명하면 이러한 인식과 논리에 있어서 유사비교의 화려한 합리성의 기만에 속을 수 있는 경향이 있다고 하겠다.
하나님의 신지식에 대한 개념의 부족, 특히 신인식에 대한 개념이 이미 앞서 지적되었는데,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실존적 개념의 합당함을 말하지 못하면서 유사비교의 합리성의 당위성을 의지하여서 하나님을 규정하여서 잘못되었다는 표현을 한다면 그 이성적 성급함과 지혜없음은 그 존재의 가벼움을 지적할 뿐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죄악 가운데, 시간인식에 따른 사람들의 인식의 발생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지식의 합당히 받을 수 없음에 있어서 있게되어지는 신전제사의식의 왜곡되고 잘못된 인식으로서의 토템과 사마니즘의 기원을 말함이 더 설득의 당위성을 상식적으로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둔다.
결론적으로
상대방의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을 세워주는 것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고 그러한 일말의 합리적 자기 발언에 대하여서 참아주고 표현의 당위성에 대하여서 연민의 당위성으로 받아줄 수도 있는 것이 상식적인 예가 될 수 있지만 그러나 기본적인 것까지도 받을 수 없도록하는 모습에 바른 이성적 비판이 있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는 차원에서 당위성에 따른 묵과라는 개념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더욱 그가 기독교인의 답변의 당위성을 임의적으로라도 말하였기에 그것에 따른 답변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부인한다는 개념의 실제의식에서는 결코 안티라는 개념으로부터의 정당성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만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한 노력의 비판은 있을 수 있으나 분별력이 죄악가운데서 성실하지 못함에 따라 형식적인 안티의 실존은 항존하겠지만 그것은 진정한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이며 그 흥망성쇠는 그 피곤을 그 합리성의 유희로 자위하기는 고통과 어려움이 실제할 것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http://geocities.com/vosscare
각주1)버틀란트 러셀, 철학이란 무엇인가,황문수역 문예출판사
러셀의 철학의 문제들이란 그의 저술로 그의 사상적 기조가 바뀌었다고들 할 수 있으나 기본적인 그의 인식의 기본을 말하는 것으로서 좋은 책인데, 그의 기술중에서는 절대라는 개념이 상식밖에 개념으로서 이해하는 경향을 읽을 수 있다. 신비와 같은 개념도 그와 같이 읽을 수 있도록 말하고 있는데 불가지론적인 측면에서도 가지론의 당위성을 상대성에서 두고 있는 가운데서 가지성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수 있다. 이 책을 참고하는 것을 권하는 정도로 언급해두겠다.
옥스포드 사전에서는 그러한 개념정리가 아주 상대적인 것과 달리 고정되어진 것으로도 묘사되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역시 이러한 철학적 기반에서 해석된 언어선택과 규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써 유익하나 그러한 신인식에 있어서의 속성적 기술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하겠다.
각주2) '역으로서의 개념은 항상 성립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
p→q이다. 또는 q→p이다와 같이 이러한 조건적 개념에서 동일한 전제적 명제들이라고 할 때에 항상 동일하게 '참'(T)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대우명제라는 것이 존제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대우명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에, 그러한 참을 위한 전제조건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상대적인 표현을 하셨다고 함에 있어서 상대적인 표현이라면 하나님을 항상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의 대우명제는 성립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절대와 상대의 상관관계라는 개념이 이미 다른 개념으로서의 상대적 개념으로서 조건명제가 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현상적 개념에서의 유사비교를 이러한 잘못된 기술적 형식논리를 기반으로 해서 따르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하겠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인간적 형태로서 해석해서 신을 묘사한다는 것은 기본적인 이성적 판단에서도 수행되어질 수 없는 모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