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신(神)을 동의 구하는 글에 대하여
답변)거두절미의 묘미를 보는 것같군요.. To Debate(모든 논쟁을 위해) 2006.07.22 20:14
거두절미라는 것.. 앞 뒤 가식적인 듯한 판에 박힌 것을 다 용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생략하고 본론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말씀하신 분도 그와 같은 그러한 측면을 따르는 듯한 것을 지적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상당히 예의를 갖추어서 말씀하심에 먼저 이러한 표현 즉 거두절미라는 판단이 어울리지 않고 예의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으나 적절한 지적이 될 수 있을 것같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저에 대한 칭찬이라고 하는 것이 가식적이라는 생각이 강요되어지고 있고 진정 예를 갖춘다고 할 때에는 제가 이미 제안했던 말들 중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유교집안의 불교신자를 자청하신다고 하더라도 제가 앞서 말한 것에 대한 생각을 마음에 두지 않으셨다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나 사상의 전개를 위한 질문에 있어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앞서 말한 것에 대하여서는..
신이 상식적으로 부인되어질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상식이 될 수 있음에 대한 개연적인 사실이라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 물론 그런 상식에서 비로소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상식에도 벗어나지 못하는 인식에서 다른 질문들이라고 하는 것들이 그 실존적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쯤은 생각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글씀을 요구함에 있어서
그리고 아주 지혜롭게 자신의 무지라고 하는 것에 대한 겸손으로써 상대방의 어휘를 주장하겠다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가 아닐 수 있음에 대하여서는 생각하고 함부로 무지적 당위성에 따른 글을 제한하는 실례를 범하는 일은 없으시길 바라겠습니다. 논쟁과 답변에 있어서 어휘선정은 글쓰는 사람의 자유입니다. 동등되게 논쟁의 상대로 생각함에 있어서는 그 어휘이해를 위한 노력은 상대방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말해둡니다. 저도 상대방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에는 물을 수 있는 용기도 있고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저보다 더 많이 알고 계신 분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많이 안다는 것과 바르게 안다는 것은 또한 다른 개념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이해를 위한 글쓰기를 제한하는 실례를 구하기 보다는 이해를 위한 질문하여 배우는 용기를 가지도록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안티적인 입장에서는 이미 배우고자 하는 용기보다는 상대방의 글쓰기의 자유를 억압하는 폭력을 의도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반박의 글쓰기 기술인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상식적으로도 인격적으로도 바른 중심을 가지도록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대화를 위한 방법론적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전반적인 답변과 반론에 즈음해서..
신의 실존에 대한 부정을 할 수 없다고 할 때에 그리고 신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알고 비판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답변없이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이해와 그에 따른 합리성을 갑을논박한다는 것은 어리석다는 표현을 말함에 있어서도 상식적으로나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비판의 실존을 말하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인 것을 말씀하신다고 할 때에 그 정당함은 자존의 하나님께서 규정하심을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실존과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합리성에서 비로소 비판적 당위성의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둡니다. 동일한 상대적인 형태적 개념만 가지고 상대적인 것의 차이와 그 허구의 사실을 말하려고 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합리성은 있으나 그 합리성의 사실의 정당함은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합리성의 합목적성시비.. 그것은 정당성의 시비의 한계적 범위에서 실존적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한계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상대적인 합리성에서 비로소 자존의 절대적 정당함이 부여되어지고 절대적 보편성이 부여되어진 상대적 합리성을 동일비교한다는 것은 임의적인 당위성에 입각한 것으로 그 정당함이 기각되어진 것이라고 함을 말해둡니다.
앞서 말하는 것은 전 안티들의 합리성의 추구과 목적이라고 하는 것의 합목적성이 절대의 자존적 정당함을 가지신 하나님의 상대적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을 판단함에 있어서는 그 상대적인 것일뿐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정당함이 개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안티들은 이 한계를 넘지 못하고 넘으려고 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 정당함이 결여되어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를 판단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절대의 자존자가 말한 상대적인 것은 절대의 재가와 절대의 보편성이 부여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비로소 상대적인 합리성의 개체적인 질문은 이미 그 실존이 기각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미 질문이라고 하는 것이 합리성의 범주에서 이미 부정되어진 것들이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답변함에 있어서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지만, 질문함에 답변의 개체적인 답변을 한다면..
질문 인용 1
1. 만민평등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1) 기독교는 만민평등주의 맞습니까?
2) 인간이 어느곳에 태어나느냐는 님이 믿고 계시는 그분이 정하시는 겁니까?
3) 님이 믿는 신은 오직 지구에서만 인간이 살도록 하셨습니다. 태양빛과 복사열 자전 공전등을 그분이 정하신거지요?
4) 흑인,백인,황인종등도 그분이 만드신거지요?
답변1)
질문을 위해서라도 개념정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동의되어질 수 있는 개념의 성립을 위한 질문이군요.. 그러나 동의되어질 수 있는 개념은 아닌 것같군요..
평등이라고 하는 개념은 그 실체가 인권이라는 개념에서 부여할 수 있는 상호적인 최상적 개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평등이라고 하는 개념이 기독교를 판단한다고 하면 인위적인 기독교 해석적 당위성을 놓기 위한 것뿐으로서 동의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인권에서 평등의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옛 철학자들도 상당히 규정하지 못한 가운데서 실증적 개념의 평등으로 다수를 위한 것으로 유익을 말할 때에 그 평등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지고 규정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하시는 분의 입장에서는 인권이라고 하는 것에서의 평등 이상의 개념을 마음에 두지 않고 계시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에 인간보다 못한 신론적 개념으로써의 입장을 취하시고 있고 좀더 확장한다면 철학적으로 인식론적 존재론으로 신론을 규정하는 인위적인 신관을 가지고 비판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한 한 개념을 동의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인식론적 존재론이라고 하는 것이 그 자체적 정당함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한 개념을 상대방에게 동의되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비로소 시작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 인식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그러한 판단을 받아야할 당위성에 메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존의 절대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인간의 인식의 판단을 받는 불안한 존재라면 그것이 진짜 신이라고 하겠습니까.. 결국 개념정의를 위해 제안하는 것은 그 합목적성이 가짜신을 말해놓고 그것이 기독교의 신이다고 동의를 구한 가운데서 재청적인 개념의 합리성의 모순을 말하고자 하는 의도와 합목적성이 보이니 얼마나 상식적으로도 몰상식적이라는 판단까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자존의 절대자를 믿고 그에게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기독교의 실존적 정체성을 이해할 때에 1) 기독교는 만민평등주의 맞습니까? 라는 질문은 이미 모르고 질문하는 것이나 모르기를 작정한 자의 기만적 의도를 가진 가운데서 질문하는 것밖에 안되는 성립되어지지 않는 질문입니다. 즉 성립되어지지 않는 질문에 답변을 구하고 있는 것은 정신적으로도 미숙을 말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외 다른 질문들도 그러한 판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인간이 어느 곳에서 태어난다 또는 인간의 지구에서의 삶 태양빛과 복사열 자전 공전, 흑인 백인 황인등의 성립에 대한 질문도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상대적 존재로서의 주체적 인식의 한계를 신의 인식의 한계로써 이해하려고하는 도피하는 이성들의 화려함.. 그것은 상대적인 개념의 미완과 정당함의 실존의 여부를 말할 수 없는 것들의 합리성의 파편들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교도들과 안티들의 모든 질문과 경영도 그러한 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 인용 2
2. 그분의 의도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1) 흑,백,황인종을 만드신 이유를 만드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2) 크게보면 유럽 = 백인 아시아,아메리카 = 황인 , 아프리카 = 흑인 대충이렇지요? 미국은 인디언들의 땅이었으니까요.(제가 잘못알고있는지도모르겠습니다.)
흑인들에게 사막에서 살게하고 과거 노예생활을 하고 미국에선 아직도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인간이하의 취급을 당하게 하며 지금도 기아와 질명에 허덕이고 원시적인 생활을 하며 심지어는 인육을 먹는 부족까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님의 신을 만날 기회마저 주지않으셨으며 그러한 삶에 만족하게 하셨는지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이스라엘 민족은 히틀러에게 갖은 핍박을 당했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 현 중동에선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이유가 과거 종교,종파싸움이 대부분이었던 전쟁과는 달리 영토분쟁입니다.
그것도 오랜전쟁으로 폐허가된 레바논과.....
그게 일본이 제국건설을 위해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식민지배한 것과 다른점은 무엇입니까?
5) 전 세상의 모든 대립격차를 욕구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과거 원시시대에는 가장 원초적인 식욕때문에 서로 싸우고 부족이 생기고 조금씩 사회가 형성되자 영역욕심때문에 싸우고 지도자들이 생기면서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기를 바라는 욕심때문에 다른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비난하고 싸우고 대충 민족별로 평등하지는 않지만 자기영역 확보하고 국가를 만들고 하니 내부에서의 분쟁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이 지식수준도 높아지고 감성보다 이성이 중요시되는 요즘 차마 전쟁은 못하고 신경전을 하지요 일본의 독도야망. 중국의 간도주장, 미국의 석유욕심등.. . 인간에게 욕심이라는 것을 주신 이유는 무엇이며 이렇게 서로 죽이고 싸우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는 것을 아시면서 없애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어떤분이 그러시던데 인간에게 고통을 주신 이유는 그것을 이겨내고 믿음을 버리지 않는 그것을 바라시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대충 맥락은 그러하였습니니다. 과거에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여 궁창의 물을 내려 다시 시작하셨었지요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아지고 세상이 썩어가서..그후 다시 지구에 인간은 50억을 넘었으며 세상은 미쳐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엽기범죄가 늘어가고 있지요. 지금 세상은 아직 노아의 방주 이전보다는 보기 좋으신겁니까? 그래서 아직 벌을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답변 2)
한마디로 행하시는 분에 대한 인식없이 그의 행하심을 말한다는 것은 이미 합리성의 모순을 말할 수 밖에 없다는 당위성에서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어떤 글을 읽을 때에 그 글쓴이에 대하여서 조사하고 그러한 조사되어지고 이해되어진 가운데서 그의 글을 이해하는 것이 그 글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합리성에 대한 판단이 되어짐은 상식적으로도 인정되는 바인데.. 안티들은 그러한 개념없이 자신의 이해라는 것의 모순을 그 상대방의 주체적 모순이라고 하는 것에서 상대적으로 자기 정당함을 찾으려고 하니 정말로 상식적으로도 상식이 없는 상식이 몰락한 모습이라는 판단이 가능한 것입니다.
몰상식이라는 표현이 가능한 그러한 것이지만 몰상식이 상식의 특이한 한 부분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을 힘써 이해하려고 노력함에 있어서 몇가지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1. 인종에 대한 것
아브라함 카이퍼는 세 인종에 대한 것을 그의 스톤강의에서 말한 바 있고 그가 그 인종우월적 개념에 의미가 있는 것과 같이 말한 것에 대하여서 기독교 내에서도 비난의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카돌릭측에서도 문서적인 측면에서 그러한 세 인종이라고 하는 것의 발달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으로도 알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하여서는 기독교 전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의 대표적인 표현들로서의 사실을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기독교 자체를 비판하는 것으로써 개별적인 비판의 당위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인종의 다양성의 발생설에 대하여서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확정하여 규정할 수 있는 합리성의 근거는 없다고 봅니다. 즉 자료불충분의 사실에 대한 개념적 비판은 성립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씀드려두겠습니다. 즉 사실적 근거라는 개념이 희박한 것들에서 사실논쟁을 한다는 것은 비합리적 것으로 논쟁적 의미와 사실을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의 인종의 다양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에 대한 것은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월적 개념으로 인한 그러한 불상사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하심을 모순되게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있어서는 그러한 비판적 당위성이 합리적이기는 하지만 그 합리성에 대한 정당한 인식적 납득 당위성은 절대의 자존자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비판적 합리성을 세울 수 없는 가운데서도 자존적 절대 정당함이 있다는 측면에서 그 비난의 당위성 강요는 기각되어지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 민족은 히틀러에게 갖은 핍박을 당했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어떤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도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했음에 대한 댓가로서 그렇게 현실적인 고통을 받고 그것이 한 예로서 히틀러에게 핍박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일말의 여지는 있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저는 개인적으로 그러한 것에 대한 판단도 그렇게 옳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심이라고 하는 것은 계시로서의 그러한 일이고 이제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서는 이스라엘이 성경의 특별계시적 존재로서의 존재적 의미는 상실되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도 예수님을 믿어야하는 일반 모든 민족과 다를바없는 일반적인 민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계시의 연장적 의미에서의 그 댓가로서 히틀러에게 고통당한 것과 관련시키는 것은 계시의 완성과 성경적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틀러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을 당한 것에 대하여서 기독교가 그 정체성 시비를 위해서 답변해야 할 것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3. 그외..
다른 질문들에 대하여서는 의미를 부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군요.. 답변을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답변을 구할 수 있는 질문적 성립이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앞선 질문도 마찬가지이지만 그것에 대한 의미를 저의 입장에서 부여하여 말씀드릴 수 있는 정도일 뿐입니다.
중동이라고 하는 사태도 사실 계시와 연관성이 있지 않은가 하는 그러한 질문도 있을 수 있는데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일반 계시적 영감이라고 하는 것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한 이야기와 그것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에 대한 것은 여기서 답변으로써 의미를 부여할 만한 것은 아니고 또한 지면적인 측면에서도 필요 이상으로 장황해질 것같아서 그냥 조금씩 차후에 논의할 수도 있겠다는 정도로 논의에 있어서 예의를 표하겠습니다.
그리고 로마신화에 대하여서는 별로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다만 그냥 읽었던 것이 생각나서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신학적 논의를 처음부터 할만한 분위기도 아니고 받을 만한 사람들도 없는 것같아서.. 물론 저보다 학식이 있는 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논의를 위한 준비를 갖춘 분들로서 글이 올라오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을 비판하기 전에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졌는가 생각하시고 바른 인식을 가졌다고하는 그러한 중심이 있을 때에 비로소 비판적 고찰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서 잘 모르면서 비판한다는 자체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니체는 진리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질문해라는 말을 했는데.. 그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을 몰상식으로 이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각없는 질문의 나열.. 허사를 경영하는 자들의 화려한 이성적 표현일뿐 그 표현과 사실성에 있어서는 그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말할 수 없음을 기억함이 하나의 지혜가 되어질 것입니다. 앞뒤를 가리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도 지적해두겠습니다. 안티라는 개념에서는 그 자체적 정당함의 합리성을 사실화하여 내놓을 수 없습니다.
(안티기독인의 질문)
말씀하신 분도 그와 같은 그러한 측면을 따르는 듯한 것을 지적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상당히 예의를 갖추어서 말씀하심에 먼저 이러한 표현 즉 거두절미라는 판단이 어울리지 않고 예의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으나 적절한 지적이 될 수 있을 것같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저에 대한 칭찬이라고 하는 것이 가식적이라는 생각이 강요되어지고 있고 진정 예를 갖춘다고 할 때에는 제가 이미 제안했던 말들 중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유교집안의 불교신자를 자청하신다고 하더라도 제가 앞서 말한 것에 대한 생각을 마음에 두지 않으셨다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나 사상의 전개를 위한 질문에 있어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앞서 말한 것에 대하여서는..
신이 상식적으로 부인되어질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상식이 될 수 있음에 대한 개연적인 사실이라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 물론 그런 상식에서 비로소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상식에도 벗어나지 못하는 인식에서 다른 질문들이라고 하는 것들이 그 실존적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쯤은 생각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글씀을 요구함에 있어서
그리고 아주 지혜롭게 자신의 무지라고 하는 것에 대한 겸손으로써 상대방의 어휘를 주장하겠다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가 아닐 수 있음에 대하여서는 생각하고 함부로 무지적 당위성에 따른 글을 제한하는 실례를 범하는 일은 없으시길 바라겠습니다. 논쟁과 답변에 있어서 어휘선정은 글쓰는 사람의 자유입니다. 동등되게 논쟁의 상대로 생각함에 있어서는 그 어휘이해를 위한 노력은 상대방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말해둡니다. 저도 상대방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에는 물을 수 있는 용기도 있고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저보다 더 많이 알고 계신 분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많이 안다는 것과 바르게 안다는 것은 또한 다른 개념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이해를 위한 글쓰기를 제한하는 실례를 구하기 보다는 이해를 위한 질문하여 배우는 용기를 가지도록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안티적인 입장에서는 이미 배우고자 하는 용기보다는 상대방의 글쓰기의 자유를 억압하는 폭력을 의도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반박의 글쓰기 기술인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상식적으로도 인격적으로도 바른 중심을 가지도록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대화를 위한 방법론적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전반적인 답변과 반론에 즈음해서..
신의 실존에 대한 부정을 할 수 없다고 할 때에 그리고 신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알고 비판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답변없이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이해와 그에 따른 합리성을 갑을논박한다는 것은 어리석다는 표현을 말함에 있어서도 상식적으로나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비판의 실존을 말하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인 것을 말씀하신다고 할 때에 그 정당함은 자존의 하나님께서 규정하심을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실존과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합리성에서 비로소 비판적 당위성의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둡니다. 동일한 상대적인 형태적 개념만 가지고 상대적인 것의 차이와 그 허구의 사실을 말하려고 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합리성은 있으나 그 합리성의 사실의 정당함은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합리성의 합목적성시비.. 그것은 정당성의 시비의 한계적 범위에서 실존적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한계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상대적인 합리성에서 비로소 자존의 절대적 정당함이 부여되어지고 절대적 보편성이 부여되어진 상대적 합리성을 동일비교한다는 것은 임의적인 당위성에 입각한 것으로 그 정당함이 기각되어진 것이라고 함을 말해둡니다.
앞서 말하는 것은 전 안티들의 합리성의 추구과 목적이라고 하는 것의 합목적성이 절대의 자존적 정당함을 가지신 하나님의 상대적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을 판단함에 있어서는 그 상대적인 것일뿐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정당함이 개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안티들은 이 한계를 넘지 못하고 넘으려고 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 정당함이 결여되어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를 판단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절대의 자존자가 말한 상대적인 것은 절대의 재가와 절대의 보편성이 부여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비로소 상대적인 합리성의 개체적인 질문은 이미 그 실존이 기각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미 질문이라고 하는 것이 합리성의 범주에서 이미 부정되어진 것들이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답변함에 있어서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지만, 질문함에 답변의 개체적인 답변을 한다면..
질문 인용 1
1. 만민평등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1) 기독교는 만민평등주의 맞습니까?
2) 인간이 어느곳에 태어나느냐는 님이 믿고 계시는 그분이 정하시는 겁니까?
3) 님이 믿는 신은 오직 지구에서만 인간이 살도록 하셨습니다. 태양빛과 복사열 자전 공전등을 그분이 정하신거지요?
4) 흑인,백인,황인종등도 그분이 만드신거지요?
답변1)
질문을 위해서라도 개념정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동의되어질 수 있는 개념의 성립을 위한 질문이군요.. 그러나 동의되어질 수 있는 개념은 아닌 것같군요..
평등이라고 하는 개념은 그 실체가 인권이라는 개념에서 부여할 수 있는 상호적인 최상적 개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평등이라고 하는 개념이 기독교를 판단한다고 하면 인위적인 기독교 해석적 당위성을 놓기 위한 것뿐으로서 동의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인권에서 평등의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옛 철학자들도 상당히 규정하지 못한 가운데서 실증적 개념의 평등으로 다수를 위한 것으로 유익을 말할 때에 그 평등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지고 규정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하시는 분의 입장에서는 인권이라고 하는 것에서의 평등 이상의 개념을 마음에 두지 않고 계시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에 인간보다 못한 신론적 개념으로써의 입장을 취하시고 있고 좀더 확장한다면 철학적으로 인식론적 존재론으로 신론을 규정하는 인위적인 신관을 가지고 비판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한 한 개념을 동의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인식론적 존재론이라고 하는 것이 그 자체적 정당함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한 개념을 상대방에게 동의되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비로소 시작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 인식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그러한 판단을 받아야할 당위성에 메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존의 절대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인간의 인식의 판단을 받는 불안한 존재라면 그것이 진짜 신이라고 하겠습니까.. 결국 개념정의를 위해 제안하는 것은 그 합목적성이 가짜신을 말해놓고 그것이 기독교의 신이다고 동의를 구한 가운데서 재청적인 개념의 합리성의 모순을 말하고자 하는 의도와 합목적성이 보이니 얼마나 상식적으로도 몰상식적이라는 판단까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자존의 절대자를 믿고 그에게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기독교의 실존적 정체성을 이해할 때에 1) 기독교는 만민평등주의 맞습니까? 라는 질문은 이미 모르고 질문하는 것이나 모르기를 작정한 자의 기만적 의도를 가진 가운데서 질문하는 것밖에 안되는 성립되어지지 않는 질문입니다. 즉 성립되어지지 않는 질문에 답변을 구하고 있는 것은 정신적으로도 미숙을 말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외 다른 질문들도 그러한 판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인간이 어느 곳에서 태어난다 또는 인간의 지구에서의 삶 태양빛과 복사열 자전 공전, 흑인 백인 황인등의 성립에 대한 질문도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상대적 존재로서의 주체적 인식의 한계를 신의 인식의 한계로써 이해하려고하는 도피하는 이성들의 화려함.. 그것은 상대적인 개념의 미완과 정당함의 실존의 여부를 말할 수 없는 것들의 합리성의 파편들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교도들과 안티들의 모든 질문과 경영도 그러한 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 인용 2
2. 그분의 의도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1) 흑,백,황인종을 만드신 이유를 만드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2) 크게보면 유럽 = 백인 아시아,아메리카 = 황인 , 아프리카 = 흑인 대충이렇지요? 미국은 인디언들의 땅이었으니까요.(제가 잘못알고있는지도모르겠습니다.)
흑인들에게 사막에서 살게하고 과거 노예생활을 하고 미국에선 아직도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인간이하의 취급을 당하게 하며 지금도 기아와 질명에 허덕이고 원시적인 생활을 하며 심지어는 인육을 먹는 부족까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님의 신을 만날 기회마저 주지않으셨으며 그러한 삶에 만족하게 하셨는지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이스라엘 민족은 히틀러에게 갖은 핍박을 당했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 현 중동에선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이유가 과거 종교,종파싸움이 대부분이었던 전쟁과는 달리 영토분쟁입니다.
그것도 오랜전쟁으로 폐허가된 레바논과.....
그게 일본이 제국건설을 위해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식민지배한 것과 다른점은 무엇입니까?
5) 전 세상의 모든 대립격차를 욕구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과거 원시시대에는 가장 원초적인 식욕때문에 서로 싸우고 부족이 생기고 조금씩 사회가 형성되자 영역욕심때문에 싸우고 지도자들이 생기면서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기를 바라는 욕심때문에 다른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비난하고 싸우고 대충 민족별로 평등하지는 않지만 자기영역 확보하고 국가를 만들고 하니 내부에서의 분쟁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이 지식수준도 높아지고 감성보다 이성이 중요시되는 요즘 차마 전쟁은 못하고 신경전을 하지요 일본의 독도야망. 중국의 간도주장, 미국의 석유욕심등.. . 인간에게 욕심이라는 것을 주신 이유는 무엇이며 이렇게 서로 죽이고 싸우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는 것을 아시면서 없애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어떤분이 그러시던데 인간에게 고통을 주신 이유는 그것을 이겨내고 믿음을 버리지 않는 그것을 바라시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대충 맥락은 그러하였습니니다. 과거에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여 궁창의 물을 내려 다시 시작하셨었지요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아지고 세상이 썩어가서..그후 다시 지구에 인간은 50억을 넘었으며 세상은 미쳐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엽기범죄가 늘어가고 있지요. 지금 세상은 아직 노아의 방주 이전보다는 보기 좋으신겁니까? 그래서 아직 벌을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답변 2)
한마디로 행하시는 분에 대한 인식없이 그의 행하심을 말한다는 것은 이미 합리성의 모순을 말할 수 밖에 없다는 당위성에서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어떤 글을 읽을 때에 그 글쓴이에 대하여서 조사하고 그러한 조사되어지고 이해되어진 가운데서 그의 글을 이해하는 것이 그 글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합리성에 대한 판단이 되어짐은 상식적으로도 인정되는 바인데.. 안티들은 그러한 개념없이 자신의 이해라는 것의 모순을 그 상대방의 주체적 모순이라고 하는 것에서 상대적으로 자기 정당함을 찾으려고 하니 정말로 상식적으로도 상식이 없는 상식이 몰락한 모습이라는 판단이 가능한 것입니다.
몰상식이라는 표현이 가능한 그러한 것이지만 몰상식이 상식의 특이한 한 부분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을 힘써 이해하려고 노력함에 있어서 몇가지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1. 인종에 대한 것
아브라함 카이퍼는 세 인종에 대한 것을 그의 스톤강의에서 말한 바 있고 그가 그 인종우월적 개념에 의미가 있는 것과 같이 말한 것에 대하여서 기독교 내에서도 비난의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카돌릭측에서도 문서적인 측면에서 그러한 세 인종이라고 하는 것의 발달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으로도 알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하여서는 기독교 전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의 대표적인 표현들로서의 사실을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기독교 자체를 비판하는 것으로써 개별적인 비판의 당위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인종의 다양성의 발생설에 대하여서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확정하여 규정할 수 있는 합리성의 근거는 없다고 봅니다. 즉 자료불충분의 사실에 대한 개념적 비판은 성립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씀드려두겠습니다. 즉 사실적 근거라는 개념이 희박한 것들에서 사실논쟁을 한다는 것은 비합리적 것으로 논쟁적 의미와 사실을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의 인종의 다양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에 대한 것은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월적 개념으로 인한 그러한 불상사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하심을 모순되게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있어서는 그러한 비판적 당위성이 합리적이기는 하지만 그 합리성에 대한 정당한 인식적 납득 당위성은 절대의 자존자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비판적 합리성을 세울 수 없는 가운데서도 자존적 절대 정당함이 있다는 측면에서 그 비난의 당위성 강요는 기각되어지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 민족은 히틀러에게 갖은 핍박을 당했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어떤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도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했음에 대한 댓가로서 그렇게 현실적인 고통을 받고 그것이 한 예로서 히틀러에게 핍박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일말의 여지는 있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저는 개인적으로 그러한 것에 대한 판단도 그렇게 옳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심이라고 하는 것은 계시로서의 그러한 일이고 이제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서는 이스라엘이 성경의 특별계시적 존재로서의 존재적 의미는 상실되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도 예수님을 믿어야하는 일반 모든 민족과 다를바없는 일반적인 민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계시의 연장적 의미에서의 그 댓가로서 히틀러에게 고통당한 것과 관련시키는 것은 계시의 완성과 성경적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틀러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을 당한 것에 대하여서 기독교가 그 정체성 시비를 위해서 답변해야 할 것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3. 그외..
다른 질문들에 대하여서는 의미를 부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군요.. 답변을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답변을 구할 수 있는 질문적 성립이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앞선 질문도 마찬가지이지만 그것에 대한 의미를 저의 입장에서 부여하여 말씀드릴 수 있는 정도일 뿐입니다.
중동이라고 하는 사태도 사실 계시와 연관성이 있지 않은가 하는 그러한 질문도 있을 수 있는데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일반 계시적 영감이라고 하는 것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한 이야기와 그것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에 대한 것은 여기서 답변으로써 의미를 부여할 만한 것은 아니고 또한 지면적인 측면에서도 필요 이상으로 장황해질 것같아서 그냥 조금씩 차후에 논의할 수도 있겠다는 정도로 논의에 있어서 예의를 표하겠습니다.
그리고 로마신화에 대하여서는 별로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다만 그냥 읽었던 것이 생각나서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신학적 논의를 처음부터 할만한 분위기도 아니고 받을 만한 사람들도 없는 것같아서.. 물론 저보다 학식이 있는 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논의를 위한 준비를 갖춘 분들로서 글이 올라오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을 비판하기 전에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졌는가 생각하시고 바른 인식을 가졌다고하는 그러한 중심이 있을 때에 비로소 비판적 고찰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서 잘 모르면서 비판한다는 자체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니체는 진리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질문해라는 말을 했는데.. 그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을 몰상식으로 이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각없는 질문의 나열.. 허사를 경영하는 자들의 화려한 이성적 표현일뿐 그 표현과 사실성에 있어서는 그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말할 수 없음을 기억함이 하나의 지혜가 되어질 것입니다. 앞뒤를 가리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도 지적해두겠습니다. 안티라는 개념에서는 그 자체적 정당함의 합리성을 사실화하여 내놓을 수 없습니다.
(안티기독인의 질문)
와이즈님 정말 똑똑하시고 현명하신분이신 듯합니다. 질문드립니다. 성경의 허구 2006.07.22 10:55 미륵(zaksal9) 새싹멤버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드리겠습니다.
전 특정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유교사상이 깊은 집안에서 불교신자를 자청하는 사람입니다.
님의 프로필을 홈페이지에서 확인 했기에 저에대해서도 대충 말씀드리는 겁니다.
대답하기 곤란하거나 질문이 말도안된다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질문들어가겠습니다.
1. 만민평등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1) 기독교는 만민평등주의 맞습니까?
2) 인간이 어느곳에 태어나느냐는 님이 믿고 계시는 그분이 정하시는 겁니까?
3) 님이 믿는 신은 오직 지구에서만 인간이 살도록 하셨습니다. 태양빛과 복사열 자전 공전등을 그분이 정하신거지요?
4) 흑인,백인,황인종등도 그분이 만드신거지요?
2. 그분의 의도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1) 흑,백,황인종을 만드신 이유를 만드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2) 크게보면 유럽 = 백인 아시아,아메리카 = 황인 , 아프리카 = 흑인 대충이렇지요? 미국은 인디언들의 땅이었으니까요.(제가 잘못알고있는지도모르겠습니다.)
흑인들에게 사막에서 살게하고 과거 노예생활을 하고 미국에선 아직도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인간이하의 취급을 당하게 하며 지금도 기아와 질명에 허덕이고 원시적인 생활을 하며 심지어는 인육을 먹는 부족까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님의 신을 만날 기회마저 주지않으셨으며 그러한 삶에 만족하게 하셨는지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이스라엘 민족은 히틀러에게 갖은 핍박을 당했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 현 중동에선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이유가 과거 종교,종파싸움이 대부분이었던 전쟁과는 달리 영토분쟁입니다. 그것도 오랜전쟁으로 폐허가된 레바논과..... 그게 일본이 제국건설을 위해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식민지배한 것과 다른점은 무엇입니까?
5) 전 세상의 모든 대립격차를 욕구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과거 원시시대에는 가장 원초적인 식욕때문에 서로 싸우고 부족이 생기고 조금씩 사회가 형성되자 영역욕심때문에 싸우고 지도자들이 생기면서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기를 바라는 욕심때문에 다른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비난하고 싸우고 대충 민족별로 평등하지는 않지만 자기영역 확보하고 국가를 만들고 하니 내부에서의 분쟁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이 지식수준도 높아지고 감성보다 이성이 중요시되는 요즘 차마 전쟁은 못하고 신경전을 하지요
일본의 독도야망. 중국의 간도주장, 미국의 석유욕심등.. . 인간에게 욕심이라는 것을 주신 이유는 무엇이며 이렇게 서로 죽이고 싸우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는 것을 아시면서 없애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어떤분이 그러시던데 인간에게 고통을 주신 이유는 그것을 이겨내고 믿음을 버리지 않는 그것을 바라시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대충 맥락은 그러하였습니니다. 과거에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여 궁창의 물을 내려 다시 시작하셨었지요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아지고 세상이 썩어가서..그후 다시 지구에 인간은 50억을 넘었으며 세상은 미쳐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엽기범죄가 늘어가고 있지요. 지금 세상은 아직 노아의 방주 이전보다는 보기 좋으신겁니까? 그래서 아직 벌을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질문할게 많았는데.. 막상 글로 옮기려니 어렵네요
전 와이즈님처럼 많이 배우지도 않고 말을 잘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한번 속독으로 읽어본것이 전부이며 전도사님들과 상담도 수차례 해보았지만 교회는 다니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라옵건데 최소한의 단어만 사용하시고 되도록이면 성경의 말씀을 예를 드시고 간결한 문장으로 대답을 하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부끄럽지만 제나이 스물아홉이나 독서에 취미를 들인지 이제 이년 조금 넘었습니다. 그래서 아직 문장이해력이 부족하며 난해하거나 국문학논문에서나 봄직한 어려운 단어들의 태반은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님이 덧글을 단것을 보았는데 너무 이해하기 힘들더군요 저의 무지를 너그러히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너무 저를 낮추듯한 문체를 쓰는게 거북하시다면 이해하여 주싶시요 제가 와이즈님보다 나이도 어리고 문어체를 쓰는데 서툽니다.그리스 로마신화에 의심이 깃든마음에는 사랑이 자리잡기 어렵다라는 말이 있지요.이상입니다.
http://geocities.com/vossc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