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신화와 기독교에 대한 유사성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질문)
랜덤 타다가 들리게 되었군요. 어떤 질문도 가능하시다니 묻겠습니다. 어디다 물어야 할지 몰라서 여기다 묻겠습니다. ^^ 답은 제 블러그에 아무대나 하시면 되구요. 묻겠습니다. 성경이 특히, 구약성경이 그것도 창세기가 그리스 로마 신화와 너무 흡사한 것은 어찌 설명해야 할까요? 어떤 분에게 이 질문을 했더니 그리스 로마 신화를 모른다 하시더군요. 또 한가지 이건 정말 심각한 질문이 될거예요. 그 악명(?) 높은 여호와증인을 단칼에 물려버린 질문이죠. 창세 이래로 지금까지 예수를 믿는척만 해도 구원을 받는다손 쳐도 구원 받을 인류의 % 가 너무 적지요. 이토록 인류가 고통 받으면서 구원의 역사를 진행해야 할 만큼 그 창조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요?..
극 소수만이 구원을 받게 된다면 그건 공의로운 하나님도 자비로운 하나님도 아니지요. 예수의 부활 사건도 하나의 헤프닝일뿐...
제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셨으면 좋겠군요. 자신의 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관문이다 라고 외치는 숱한 또라이 이단 소수 종교와의 차별성 말구요. 세계 최대 종파이자 가장 합리적인 종교로 인정받는 기독교(구교+개신교)도 결국은 소수 구원론에 막힐 수 밖
(답변)먼저 질문의 성격에 대하여서..
첫번째 질문은 "구약성경이 그것도 창세기가 그리스 로마 신화와 너무 흡사한 것은 어찌 설명해야 할까요?"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롤란드 해리슨은 구약서론에서 구약 연구에 대한 언급을 기술하고 있는데, 헤르만 궁켈은 그의 양식비평적 입장에서 시편이라고 하는 것과 애굽과 이집트등과 관련되어짐에 대하여서 말하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이후에 고고학적인 발견이 있게 되어지는데 그곳에서는 고대 근동과 관련되어진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가운데 삶의 정황적 접근이라고 함의 기본적인 설정에서도 상대적인 측면을 말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게 되었음을 언급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님이 질문하신 로마신화과 비슷하다고 함을 말씀하심에 있어서는 역시 삶의 정황이라고 하는 양식비평의 한 형태를 따르는 가운데서 질문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각설하고.. 단적으로 반문되어질 수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은 유사비교라고 함이 가능하다고 하여서 동일성과 상관관계성의 파생성을 말할 수 있다는 당위성이 항상 성립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개연적 당위성에서 출발하고 있는 질문은 그 성립적인 측면에서 참고의 범위를 넘지 못하며 임의적 단정적 비판이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함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철학적인 측면에서도 버틀란트 러셀은 그의 서양철학사에서 기독교의 유사적 개념을 올림푸스 신들과의 관계성 보다도 오르페이우스적인 바커스적인 측면에서 그 기원적 당위성을 찾고 있습니다.
물론 버틀란트 러셀의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언급을 정당한 합리적 사고로써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님께서 질문하신 것의 최소한의 상대적 여지를 가질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예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 로마신화와의 관계성이라고 하는 것도 아주 제한되어진 가운데서 합리성의 유사비교가 가능하다고 함을 인정하면서도 동일한 또는 상관관계에서의 기독교적 증거 구약성경의 파생적 당위성을 강조할 수 있는 실제적인 기반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두번째 질문으로써 "창세 이래로 지금까지 예수를 믿는척만 해도 구원을 받는다손 쳐도 구원 받을 인류의 % 가 너무 적지요. 이토록 인류가 고통 받으면서 구원의 역사를 진행해야 할 만큼 그 창조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요?.. 극 소수만이 구원을 받게 된다면 그건 공의로운 하나님도 자비로운 하나님도 아니지요."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공의라는 개념이라고 함을 인식하고 규정함에 있어서 그 공의가 상대적인 판단에서 임의적으로 규정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합리적인 재고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상대적 타당성에서 볼 때에 그리고 인륜적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에는 그러한 님의 판단하심이 옳다는 타당성을 임의적으로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륜적인 개념으로 자존적 절대자의 증거적 개념의 실체를 판단할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한 답변을 먼저 하심이 그 다음으로써 님의 합리성에 따른 판단의 당위성을 세울 수 있다고 봅니다.
인륜적 판단의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이 스스로 취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으로써의 특정집단적 당위성에서 상대적으로 인정되어진 것인지 생각할 때에 후자적 판단은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자기 정당함이라고 함을 판단할 수 있는 가운데서 불합리적인 것이라고 규정함에 있어서는 그 인식이 성립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질문이라기 보다는 언급에서 "예수의 부활 사건도 하나의 헤프닝일뿐... "에 대하여서
이러한 것은 님의 합리적 판단을 언급하기 전에 단순한 임의적 규정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구체적으로 그러한 임의적 규정을 하심에 대한 합리적 내용을 말씀하실 때에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네번째 역시 언급에 대하여서 ^^ "자신의 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관문이다 라고 외치는 숱한 또라이 이단 소수 종교와의 차별성 말구요. 세계 최대 종파이자 가장 합리적인 종교로 인정받는 기독교(구교+개신교)도 결국은 소수 구원론에 막힐 수 밖"라고 말씀하셨는데..
또라이라는 표현..^^ 글쎄요.. 합리성의 정체성과 그것의 타당성에 대한 답변을 하시고 난 다음에 쓰셔도 좋을 것인데 너무 성급한 언급을 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좋은 답변을 기대하겠습니다.
랜덤 타다가 들리게 되었군요. 어떤 질문도 가능하시다니 묻겠습니다. 어디다 물어야 할지 몰라서 여기다 묻겠습니다. ^^ 답은 제 블러그에 아무대나 하시면 되구요. 묻겠습니다. 성경이 특히, 구약성경이 그것도 창세기가 그리스 로마 신화와 너무 흡사한 것은 어찌 설명해야 할까요? 어떤 분에게 이 질문을 했더니 그리스 로마 신화를 모른다 하시더군요. 또 한가지 이건 정말 심각한 질문이 될거예요. 그 악명(?) 높은 여호와증인을 단칼에 물려버린 질문이죠. 창세 이래로 지금까지 예수를 믿는척만 해도 구원을 받는다손 쳐도 구원 받을 인류의 % 가 너무 적지요. 이토록 인류가 고통 받으면서 구원의 역사를 진행해야 할 만큼 그 창조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요?..
극 소수만이 구원을 받게 된다면 그건 공의로운 하나님도 자비로운 하나님도 아니지요. 예수의 부활 사건도 하나의 헤프닝일뿐...
제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셨으면 좋겠군요. 자신의 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관문이다 라고 외치는 숱한 또라이 이단 소수 종교와의 차별성 말구요. 세계 최대 종파이자 가장 합리적인 종교로 인정받는 기독교(구교+개신교)도 결국은 소수 구원론에 막힐 수 밖
(답변)먼저 질문의 성격에 대하여서..
첫번째 질문은 "구약성경이 그것도 창세기가 그리스 로마 신화와 너무 흡사한 것은 어찌 설명해야 할까요?"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롤란드 해리슨은 구약서론에서 구약 연구에 대한 언급을 기술하고 있는데, 헤르만 궁켈은 그의 양식비평적 입장에서 시편이라고 하는 것과 애굽과 이집트등과 관련되어짐에 대하여서 말하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이후에 고고학적인 발견이 있게 되어지는데 그곳에서는 고대 근동과 관련되어진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가운데 삶의 정황적 접근이라고 함의 기본적인 설정에서도 상대적인 측면을 말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게 되었음을 언급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님이 질문하신 로마신화과 비슷하다고 함을 말씀하심에 있어서는 역시 삶의 정황이라고 하는 양식비평의 한 형태를 따르는 가운데서 질문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각설하고.. 단적으로 반문되어질 수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은 유사비교라고 함이 가능하다고 하여서 동일성과 상관관계성의 파생성을 말할 수 있다는 당위성이 항상 성립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개연적 당위성에서 출발하고 있는 질문은 그 성립적인 측면에서 참고의 범위를 넘지 못하며 임의적 단정적 비판이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함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철학적인 측면에서도 버틀란트 러셀은 그의 서양철학사에서 기독교의 유사적 개념을 올림푸스 신들과의 관계성 보다도 오르페이우스적인 바커스적인 측면에서 그 기원적 당위성을 찾고 있습니다.
물론 버틀란트 러셀의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언급을 정당한 합리적 사고로써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님께서 질문하신 것의 최소한의 상대적 여지를 가질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예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 로마신화와의 관계성이라고 하는 것도 아주 제한되어진 가운데서 합리성의 유사비교가 가능하다고 함을 인정하면서도 동일한 또는 상관관계에서의 기독교적 증거 구약성경의 파생적 당위성을 강조할 수 있는 실제적인 기반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두번째 질문으로써 "창세 이래로 지금까지 예수를 믿는척만 해도 구원을 받는다손 쳐도 구원 받을 인류의 % 가 너무 적지요. 이토록 인류가 고통 받으면서 구원의 역사를 진행해야 할 만큼 그 창조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요?.. 극 소수만이 구원을 받게 된다면 그건 공의로운 하나님도 자비로운 하나님도 아니지요."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공의라는 개념이라고 함을 인식하고 규정함에 있어서 그 공의가 상대적인 판단에서 임의적으로 규정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합리적인 재고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상대적 타당성에서 볼 때에 그리고 인륜적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에는 그러한 님의 판단하심이 옳다는 타당성을 임의적으로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륜적인 개념으로 자존적 절대자의 증거적 개념의 실체를 판단할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한 답변을 먼저 하심이 그 다음으로써 님의 합리성에 따른 판단의 당위성을 세울 수 있다고 봅니다.
인륜적 판단의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이 스스로 취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으로써의 특정집단적 당위성에서 상대적으로 인정되어진 것인지 생각할 때에 후자적 판단은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자기 정당함이라고 함을 판단할 수 있는 가운데서 불합리적인 것이라고 규정함에 있어서는 그 인식이 성립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질문이라기 보다는 언급에서 "예수의 부활 사건도 하나의 헤프닝일뿐... "에 대하여서
이러한 것은 님의 합리적 판단을 언급하기 전에 단순한 임의적 규정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구체적으로 그러한 임의적 규정을 하심에 대한 합리적 내용을 말씀하실 때에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네번째 역시 언급에 대하여서 ^^ "자신의 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관문이다 라고 외치는 숱한 또라이 이단 소수 종교와의 차별성 말구요. 세계 최대 종파이자 가장 합리적인 종교로 인정받는 기독교(구교+개신교)도 결국은 소수 구원론에 막힐 수 밖"라고 말씀하셨는데..
또라이라는 표현..^^ 글쎄요.. 합리성의 정체성과 그것의 타당성에 대한 답변을 하시고 난 다음에 쓰셔도 좋을 것인데 너무 성급한 언급을 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좋은 답변을 기대하겠습니다.
comment: 질문자는 교회에서 이단으로 말하고 있는 여호와증인으로 오해하시는 것같습니다. 저는 여호와증인이 아니며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글쓴이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