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증인의 기독론 오류에 대하여
요즘에는 여호와 증인들도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개신교도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말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가라고 할 때에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런 다음 언급하는 것이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며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증거는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호와 증인은 예수님을 믿는다면서도 결국은 믿지 않는 자들의 모습으로 기만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과는 달리 그런 진화적 인식이 적응적 선택을 받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교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도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자들, 예수님을 인위적인 인성적 개념으로 축소 변형시키고 단성론적 개념으로 흐르고 있는 것으로 옛부터 이단으로 알려진 전통적 판단을 받는 것도 옳다고 봅니다.
앞서 지적한 것과 같이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의 두 속성의 분리나 혼합되어지지 않으면서도 하나라고 하는 증거가 우리가 구별하여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으로서의 '자존성'의 속성적 개념은 성부하나님과의 동일성을 나타내심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장하신다는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증거로서의 자신의 자기계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증인의 성경 인용에 대하여
'그들의 주장은 마태복음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경 인용 하심에 대하여
예수님은 모세를 믿었더면 나를 믿었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더 구체적인 본문을 마음에 두도록 하셨음을 주목합니다. 즉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과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 12장 18절이하에서 부활을 말씀하시는데, 마가복음 12장26절에서는 '모세의 가시나무 떨기 사건'을 언급하셨다는 것을 주목합니다.
"죽은 자의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데 너희가 모세의 책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막 12:26~27)
즉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에 대하여서 세 번 이상 말씀하셨는데, 즉 그 부활에 대한 개념을 출애굽기 3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이름의 계시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와 연결시키신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신성의 속성으로서 자기 계시 즉 '자존성'으로서, 예수님 자신이 성부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씀하시는 자기 계시인 것입니다.
결론에 즈음해서
전통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삼위일체를 믿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 전통은 이어갑니다.1) 어떤 이들은 이것이 개혁하지 못한 중세의 오류처럼 생각하는데, 그것은 실재에 따른 실제론에 따른 구별적 입장에서, 다른 실재론에서 동일한 표현으로 연속성과 불연속성으로 그 구별적 개혁신학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2)
여호와증인의 기독론에 대한 이해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 다가가기 위한 예수님을 인성적 개념에 국한하여 인정한다는 개념에서 믿는다는 개념으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정직하지 못한 것이며 기독교사상에서 주목할 수 있듯이 단성론자들의 한 부류에서 읽게 되는 그들의 이단성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3)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시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실 때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이미 예정되어진 것이며 그것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길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하여서 세번 이상 말씀하신 것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증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면서도 그 이름에 합당한 그 이름으로부터의 정당성을 찾지 않고 그냥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의 신성으로서의 자존성을 말하는 부활의 증인의 자리에 서야 할 것이며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경배받으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이름을 합당하게 말하지 못하는 즉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며 하나님의 판단을 피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거짓, 이단이라는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연약해서 잘못 해석했다는 것과 아예 잘못을 정당하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후자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는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로서 주께서 구원을 베푸심의 은혜와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각주 1) 코넬리우스 반틸, 개혁주의 신학 서론, 이승구, 기독교문서선교회 1995. p. 10. 게할더스 보스의 뒤를 잇는 반틸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다.
각주 2) 하나님의 실재론에 대한 개념은 중세에 많이 언급되었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통한 자기계시로서의 '자존성'이라는 신성의 속성적 개념에서 실재론이 다시 중세와 현 가톨릭과 다른 신학적 작업이 이루어지는데,분리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구별적 개념이기 때문에, 연속성이 존재함을 말하고자 한다. 어떤 이들은 종교개혁 이후에 신학이 가톨릭적 개념에 대한 어떤 보상적 개념으로 혹은 가톨릭적 전통을 못벗어나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연속과 불연속이라는 개념에 앞선 예수님의 신성의 속성으로서의 자존성을 주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이론적 개념이 아니면 앞선 개혁신학은 모두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믿음으로 구별하여 신학적 작업을 했다는 것과 또한 이 이론의 상관성은 있기 때문이다. 즉 다만 좀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즉 돕는 것으로서 이 이론이 자리매김 된다는 것을 말해둔다.
각주 3) 앞서 말한 중세와 가톨릭신학과의 개혁신학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한 이해의 한 예가 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 이단이라는 개념에 비로소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전통적 이단 개념이 옳다는 것을 구별하여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아울러 지적할 수 있다. 즉 전통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별하여 우리의 고백으로 증거하는 가운데 전통은 실제로 이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