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swers to antichristisms

일요일, 4월 30, 2006

글쓰기와 비평에 대하여

글을 씀에 있어서: 글을 읽고 비윤리적으로 대중을 기만하는 반기련을 비롯하여 안티적 입장의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예의라고 하는 것과 글을 씀에 있어서 개인적인 입장을 이해하지 못함에 따라 아니 이해하지 않으려고 함의 정직함이 결여됨에 따라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글쓰기라는 것에 대한 견해의 차이는 보편적으로 말한다면 문학과 철학이라고 함의 차이로서 말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에서 공부하신 박이문교수의 문학과 철학이라는 것의 개념구분적 차이의 가능성에 대한 재고를 위한 글을 쓴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 문학과 철학이라고 함이 사상의 전달에 대한 회의적 개념의 동반으로 인해 재구성이라는 도구적 개념만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각주1)

이러한 것은 사실 비평이라고 함의 양식이라고 하는 것이 공허하고 아주 비윤리적 극단을 달리게 하며 기만적 요소를 위한 마키아벨리적 개념으로 자리매김되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요소는 말의 내용이라고 하는 것보다도 말의 표현 기법을 우선시하고 있는 것으로 이것은 실재의식이나 실제의식과 같은 것에 대한 개념을 배제한 자들의 기본적인 입장이며 학적으로는 니체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데리다와 그에 따른 미국의 예일학파의 영향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각주2)

앞서 비윤리적 개념이라고 함은 그 글을 쓰는 자의 실재의식이라고 함을 문학에서는 전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의 딜레마에서 임의적 자위의 '놀이'를 하고 있는데, 사실 철학적 글쓰기나 사상의 표현에 있어서는 그 글쓰는 자의 기준으로써의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의식이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는 것으로써 비인격적인 비판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극단적이라고 할 때에 있어서는 그 글쓰는 자의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의식을 간과하는 가운데서 그 표현적 입장을 임의적으로 해석하고 자의적으로 재구성하여 말하는 소위 어떤이들의 '사료분석'이라는 표현들이 지나친 것으로 모자람에 이르는 비평으로 나타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버틀란트 러셀도 자신을 비평할 때에 학식이 있고 걸맞는 사람이 비평해줄 것을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모르고 간과하고 글쓴이에 대한 폄하에서 그 합리성에 대한 기본적 이해의 몰락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그는 의식해서 말했던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암튼.. native에게 그 자신의 나라를 공부하라고 말함에 있어서, 순수한 입장의 표현이 되어질 수 있지만 대부분 비난적 개념의 폄하적 입장을 가지고 말한다고 하는 것은 앞서 말한 글쓰기와 비평에 대한 맹목적 신뢰나 또는 개념없는 막연한 불안감이나 두려움에 따른 어리석음의 표현일 것입니다.

글쓰기와 비평에서도 그러한 보편적인 인식의 경향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함이 글쓰는 사람의 인격이 되어질 것이고,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 행하는 자들은 그러한 것을 가지고 기만하려고 하는 자들의 맹목적 추종자들로서 자기 기만적 추함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어리석음을 자초할 따름인 것입니다.

프랑스에서 한 문호 사르트르.. 그나라 국민들은 한때.. 사르트르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그러한 생각을 할 정도로 그를 신뢰했는데.. 사르트는 정작 그의 글쓰는 것에 있어서 글이 틀린다는 것에 대하여서 그렇게 신경쓰지 않고 그것을 고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글이 아니라 글의 내용이라고함을 말했음에 대하여서 프리드리히 빠제는 말하고 있음을 기억합니다. 그 문호의 인식을 지금도 계승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여기서 가릴 것은 아니고 좀더 보편의식에 대한 개념도 없이 글쓰는 것으로 비난하는 어리석음은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각주1) 서양사에서 세 악동으로 불리고 있는 자들 중에서 프리드리히 니체의 허무주의적 개념의 발상은 현실을 위한 창조적인 개념으로 해석되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니체에 대한 해석의 한 경향일뿐 그의 허무주의적 개념이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있게 되어지는 모습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의 경향은 글씀이라고 하는 것의 실제의식이 없는 가운데서 그 방법론적 개념으로서의 논리적 개념이 중요한 것으로 자리매김되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프랑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것입니다. 그들의 정서는 실증주의적 개념이면서도 그 실증주의적 개념이 어떤 실재적 개념에서의 실증을 말하기에 부적절함을 인식한 나머지 방법의 실제성을 재구성하는 'How'의 입장을 상당히 중요시 하는 합리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각주2) 데리다와 예일학파라고 하는 책을 볼 수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미국에서의 그 데리다의 인기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프리드리히 빠제라는 사람은 그의 유쾌한 철학이라는 책에서 조소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꼬리말

글쓴이 반기련을 의식하고 글을 썼습니다. 그 만난 20대 30대 젊은이들의 입장이 날카롭고 보편적인 지식을 갖춘 것을 보면서 참 기본적인 학문적 입장을 취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비난하는 모습을 보고 실망이 들더군요.. 00:17


글쓴이 반기련에서는 저의 글에 대한 분석이라고 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 글못쓴다고 하며 자신들이 저의 말을 재구성해놓고 웃고 있는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저의 대한 실재와 실제의식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한 가운데서 말입니다. 00:19


글쓴이 그리고 여러 나라 사상들을 읽고 생각할 때에는 그 이질성과 동일성 그리고 유사성과 인용함에 대한 가능성등을 생각해야 하는데 전혀 그러한 것없이 퍼오기도 하고 인용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참 답답함을 느낍니다. 00:20


글쓴이 인터넷의 영향으로 외국을 소개하거나 그곳에서 되어진 일들을 소개하는 각 기자들의 입장에서도 상당히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개인적으로 유감이고 또.. 반기련의 몇몇 철학적 입장이 견고한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을 기만해서 글쓰기와 비평을 외곡하고 회원들을 기만하는 경향이 있는 것에 대하여서도 유감이군요 00:22


글쓴이 상대방이 얼마나 배웠는가 하는 학력에 대한 맹목적 판단으로 그의 말을 임의적으로 무시하는 소위 '너 얼마나 배웠어 배우지도 못한 것이 잘난척하네..'이런 입장에서 그 말하는 사람의 말을 맹목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학원정도 나오면 뭐 더 배울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00:24


글쓴이 불가지론을 넘지 못하는 한계상황에서 학력에 대한 화려한 메달리스트들의 꿈은 실제적이지 못하지요..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 맹목적 메달리스트들의 화려한 비평은 참 가증스럽기 짝이 없지요.. 00:26


글쓴이 아 개인적으로는 더 공부한 사람을 존중하고 배워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맹목적인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지요.. 물론 불가지론을 넘을 수 있는 가운데서 참고한다면 더 많이 공부할 수 있고 더 많이 연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00:27


글쓴이 글쓰기와 비평.. 맹목성과 개연적 두려움이 놀이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00:29


글쓴이 그간 저의 글에 대한 여자적 해석으로 놀이를 하신 분들에 대한 저의 답변입니다.


http://geocities.com/vosscare

글쓴이

반기련이 이해하지도 답변하지도 못한 글

합리성의 당위성에 대하여서

설명: 반 기독교연합회, 반기련에 올렸던 글입니다. 글을 쓸 수 없도록 해놓고 반론도 하지 못한 가운데서 근거없이 비난도 하고 있기에 어떤 글을 올렸는지에 대한 표현이 있어야 할 것같아서 저의 글을 올립니다.


안녕하세요..
개인적으로 자주 찾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다른 안티안의 글을 우연히 보았는데.. 그러한 글이 저의 언급과 비교되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이해하지 못한 부분의 오류와 판단에 유익을 위해 글을 써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는 무뇌라고 하는 말을 두려워하는 합리성을 추구하는 가운데서 비판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해하지 못한 비판의 글이 있어서.. 저의 입장에서는 분명함을 말하고자 하고 위하는 측면에서는 이성없는 비판의 목소리를 통해 안티안들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을 가려주기 위함입니다.

뭐.. 안티안들의 보편성이 이미 왜곡되어지고 편협하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지만 너무 맹목적이고 피상적이라는 점에 부끄러움을 그래도 감추어주고 바르게 가르쳐주는 것이 회원으로서 기본적인 입장이 될 것 같아서 글을 씁니다.

안티안의 싸이 페이퍼에서,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 성부하나님 자신이심을 말하였음을 지적하면서, 공자나 석가들이 먼저 온 자들로서 예수님을 쫄병으로 묘사하는 그 선취적 개념의 권위로 비웃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한마디 해두었는데.. 반기련에서 한마디 해두는 것이 좀더 분명하게 말하게 되는 것일 수 있어서.. 말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것은 그 하나님이 자존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자신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그 이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심에 있어서 상대적인 측면에서는 그것에 대한 비판의 정당함을 스스로 그리고 절대로 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합목적성의 시비와 그 이하 합리성의파편적당위성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존적 절대 정당함이 있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합리성의 실존이 항상 예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상대적인 판단과 비판을 가능하게 한다고 해도 비로소 판단을 받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인 언급을 하면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말'은 그 판단이라고 하는 인식의 계기로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것이며 오히려 그것을 주장하여서 말씀하심에 자기 정당함을 절대적으로 취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한번 웃는 것과 같은 것으로 예수님이 다른 성인들의 나타남 뒤에 왔다는 것으로 그 권위적 실존의 정당함을 부인하고 조소하는 것은 이미 합리성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즉 합리성의 인식의 계기인 시간의 개념에서 비로소 사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신학과 철학에서 철학의 개조와 변형을 말하고 있고 또 수행적 모순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여서 전제되어질 수 있는 필요의 모순은 대화를 위한 것으로 인정하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것이 절대자에게 요구되어질 수 있는 사실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펠의 윤리적 담론에서 말하고 있는 수행적 모순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 상대적인 정당함의 여지를 변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절대의 개념에 대하여서는 당위성을 스스로 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간에 대한 권위.. 옛 가톨릭에서는 터툴리안을 비롯한 자들의 '취득시효'라는 개념에서 먼저 되어짐에 대한 것으로써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수행적 모순이라는 것의 당위성에서 납득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고 그러한 노력을 하겠지만 기독교에서는 시간의 개념의 판단에서 비로소 실존적 정당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시간이라고 하는 것의 인식의 사실에 대하여서도 그것이 절대자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시간의 실재적 정당함을 입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임의적 시간관을 가지고 상대적인 일반 역사의 시간관을 비로소 생각해서 예수님에 대하여서 돌을 던지는 자의 모습은 인식의 모자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시간관과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시간의 상관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시간의 실존이라고 함을 재고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역사적 예수님의 실존을 비웃는다면 그야말로 인식의 계시로서 시간의 개념이 없는 자의 어리석음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시간의 실존과 개념이라고 하는 것에 사실성을 분명히 하지 않는 가운데서 비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그러한 역사관으로 예수님의 실존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을 말해두겠습니다.

그리고 더 분명히 말하게 되는 것은 삼위 일체로서 예수님은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의 자기 계시라는 점에서 그 실존적 정당함을 스스로 절대적으로 취하시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합리성으로써 비판함에 모든 합목적성이 재가를 받지 않은 한 그 정당한 실존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부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심에 대한 것은 그냥 맹목적인 전제가 아니라 그 역사적인 순서적 실존적 권위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계시적 증거임을 말해두겠습니다.

인식의 계기로써의 시간의 개념에 대한 철학과 신학에서의 많은 노력들이 있는데 그러한 것의 합리성의 아름다움은 있으나 그 실존적 정당함은 여전히 부재하며 그것을 위한 상대적인 합의에 전전긍긍할 뿐이라는 것을 말해둡니다. 그것은 세상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정체성이 그 실존을 말하지 못해서 불가지론을 넘지 못하고 허사의 경영의 아름다움으로 위로를 삼아야 하는 슬픈 현실이라고 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들의 실존적 정당함을 부여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진정 이성의 실존을 말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 지혜의 근본이신 구주이신 예수님을 믿으시길 바라겠습니다.








글에 대한 상황설명:


안티기독교에서 예수님을 비하하는 만화가 있었는데, 그것의 내용인 즉,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 자신임을 인정하면서도 역사적으로 공자나 석가가 먼저 왔다는 것을 통해서 실존을 비교하고 있고 비교 폄하하는 것으로 예수님을 군대 신참으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역사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비로소 실존적 비교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늦게 오심의 모습은 있으나 자존하시는 하나님 자신으로서 역사이전의 역사를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역사라는 시간의 순서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에 대한 인식의 결핍이라고 하는 것이 잘못된 비판을 낳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글입니다. 그러한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반 기독교 연합회 회원으로서 그 글을 올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대로 된 비판은 없고 비난하고 있고 글을 쓰는 것을 제한하는 가운데서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어서 저의 입장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같아.. 이글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글의 동향과 저의 입장 :


반기련에서 비판의 내용은 이 글에 대한 직접적인 글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없고 하나님을 증명하라고 하는 것에 대한 요구였습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저의 요구는 증명이라고 하는 것이 실존을 말할 수 있는가 라는 반문을 했던 것입니다.

증명하라는 그 말이 성립이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였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맹목적인 증명요구를 하더군요 그리고 하나님의 부존재에 대한 증명을 하라고 하니까.. 그것에 표현을 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증명이 실존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야 그들의 요구와 답변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고려하지 않은 가운데서는 그들의 기독교 비판의 증명의 사실들과 그들의 모든 합리성과 방향은 정체성을 잃은 것입니다.


반기련에서 기독신앙에 대하여서 이해하지 못함에 대하여 그것을 지적했는데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서 비난하고 있고 가끔 저의 블로그에 와서 가명으로 욕을 하시는 분들이 있군요.. 그래서 무슨 글을 올렸는지에 대한 답변이 있어야 할 것같아서 재차 글을 올립니다.


이해하지 못했다고 함은 그들의 인식의 계기로서의 시간관이라고 함이 정당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정당하지 못한 시간관으로 인한 역사인식은 주님의 역사적 증거를 비로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부정된 인식의 계기로서의 시간관에서는 답변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참고: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증거와 사실에 대하여서
반기독교 선언문에 대한 답변

화요일, 4월 18, 2006

반기련운영자 유령의 비윤리적 이성에 대하여서..

반기련운영자 유령의 비윤리적 이성에 대하여서..

제가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도 임의적으로 박탈하고 대화중에 차단하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존재한다고 하는 자가 존재를 입증해야 한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말을 하고 있고 또.. 내가 어떤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지 전혀 상황파악이 안되는 것을 봅니다.

저는 기본적인 입장이 증명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증거라고 하는 것을 입장을 삼고 있고 그것이 핑계치 못할 상대적으로도 납득 당위성을 자체적으로 비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글은 이것입니다.

그리고 존재에 대한 부재를 증명하라고 한 것은 신에 대한 존재증명을 다른 이가, 구체적으로 밝히면, 반기련의 회원이신 신중해님이 주장했고 그것에 대하여서 부당한 것임을 말함에 있어서 '증명이 실존을 나타낼 수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직접적인 참여도 하지 않고 나중에 저의 한 말을 가지고 과잉반응하면 상황판단을 하시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비난도 비판적인 당위성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 있어야 하는데 이런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사람이 반기련의 운영자로서 반기련이 비 윤리적 단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게 되는 강요를 스스로 취하고 있음을 봅니다.

아래는 저에게 전혀 개념없는 가운데서 맹목적으로 비난한 내용입니다. 기본적인 윤리시비를 위해서 분명히 언급할 필요가 있어서 글을 올립니다.


반기련에 올렸던 저의 글에 대하여서 반론을 하지 못하게 하고 비난한 것에 대하여서 제가 저의 입장을 밝힌 글입니다.

http://sophiadei.blogspot.com/2006/04/blog-post_15.html

이후로 저의 글에 대하여서 분명하게 반론하시고 윤리적 예를 갖춘 글을 쓰실 수 있는 인성과 역량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반기련에서 존재증명에 대한 시비를 읽을 수 있는 상황리플은 여기를 참고하세요
http://cafe.daum.net/gloriadei 에서 지성 토론방 26번 글입니다.
운영자 유령님은 참석하지 않으셨고 심술해님이 먼저 증명에 대한 이야기를 함에 있어서 제가 그 반문을 했던 것입니다. 상황적인 것을 고려하지 않고 내가 한 말만 임의적으로 인용하신 것은 의도성을 임의적으로 조작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유령(손님)

==이명신의 리플===
이제 증명은 유령님이 하실 차례입니다.
신이 없다는 것에 대한 증명을 하세요..
반박할 수 없을 절대적인 것이나 절대의 재가가 있는 것으로..
그리고 그 증거적 증명이 안되면 안된다는 것에 대한 비판적 글을 올리시고
제가 그것에 답변할 수 없을 때에 님의 입장을 확증하도록 하심이 좀더 공정할 것입니다.
님의 증명도 기다리겠습니다.
=== 나의 답변===
내가 처음부터 말했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자가 존재를 입증해야하고, 상대방에게 부존재를 증명라는 파렴치한 짓은하지 말라고..
그런데도 나에게 부존재를 증명을 요구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가르쳐 주지.
"너는 너의 어머니가 지나가는 똥개와 수간을 해서 너을 임신하고 너를 낳아다.
그래서 너는 인간이 아니고 개새끼이다."
부존재를 증명해봐라 그럼 내가 야훼의 부존재를 증명해주지.
예상되는 답변에 유전자검사니 뭐니 나오겠지만........
개새끼의 유전자도 내가 변개시켜서 인간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러한 헛소리는 부존재 증명이 되지 못한다.
야훼가 있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는 증거를 가져와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함부로 존재하지 않는 야훼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상대방에게 입증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는
너의 파렴치한 행위로 인해서 너는 개새끼가 됐으며,
네가 개새끼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 하기전에는
앞으로 너와 내가 만나는 곳에서는 언제나 너는 개새끼로 호칭될 것이다.
그리고 너로 인해서 너의 어머니는 수간으로 너를 잉태한 개년이 되는 것이다.
2006-04-18 (tue) 1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