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swers to antichristisms

금요일, 5월 19, 2006

다빈치코드(Da Vinci code)의 거짓됨과 기만성에 대하여

글을 씀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인기가 있다는 것과 또한 좋은 또는 옳은 것이라는 것과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인기몰이 사상(just as times books)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같아서 그냥 지나치려고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글을 씀에 있어서 몇가지 동기적인 측면을 고려할 때에 당위성을 느끼게 됨에 있어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신앙에 대한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거짓 사상이 마냥 그러한 것과 같이 오해되어지고 기만되어진다는 것에 대하여서 신앙적인 측면에서 분명한 답변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이 그 첫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일반 상식적인 개념에서도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으로 특정 집단 특히 우리 기독교에 대하여서 왜곡시키고 피해를 줄 수 있는 것과 같이 기만시키고 있다는 것과 일반 사람들의 상식적인 판단을 흐려놓는 가운데서 글쓰는 사람의 잘못이라고 함을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이 그 글쓴 자를 비롯한 오도되어진 편견으로 고통받는 자들에게 좀더 자유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부언을 더한다면 '다빈치 코드'의 합리성을 나타내는 개개의 문구와 입장을 비판하는 것은 기독교계 전반적으로 활발하게 표현하고 있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총체적으로 그것이 부정되었음에 대한 것을 그 합리성의 정당함이 부정되어 거짓이라고 함의 실체를 지적함으로 글을 한정지우도록 하겠습니다.


본론에 즈음해서

1, 기독교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사실이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다빈치코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표명함에 있어서 잘못이해하는 부분이 있음을 지적함으로 글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그만한 교회의 교육과 잘못된 것의 반영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과 같이 생각하거나 임의적인 기득권의 사수적 개념으로 일관하겠다는 맹목적인 어떤 피해의식에서 비로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는 것은 다빈치 코드라는 입장과 그것에 관련된 사상들이 하나님 앞에서와 일반 사람들의 보편적인 인식에서 본다고 해도 거짓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빈치 코드를 말하는 서양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들의 합리성의 무비판적인 표현이 가능한 '언론 플레이'들이 오히려 책망을 받아야하고 또한 미련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유럽 대륙의 합리성의 인식과 합리성이라고 하는것은 실재라는 개념을 전제로 하지 않은 가운데서 말하는 경향이 있고, 그들은 말할 수 있다는 방법 즉 'How'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합리성이 가능하다고 하면 그 실재의 여부라고 함을 말할 수 있다고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 특수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각 나라에 따라서 합리성이라고 함에서 실재라는 개념을 마음에 두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재고없이, 합리성에 비로소 따르는 실존에 대한 일방적 판단에 따른 사실성의 개연성으로, 그것도 실재도 아닌 것을 말한다는 것과 그대로 받아들여서 상업화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용납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더욱 특정 집단으로써 우리 기독교에 대한 왜곡을 의도하면서까지 말입니다.

만일 사실이라고 함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특정 집단(우리 기독교의 입장)에 피해를 주는 것을 상업화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법적인 소송이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그 다빈치코드를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기독교가 사실이라고 함을 어떻게 말할수 있는가 하는 것에서 부정적이라는 임의적 생각으로 자신들의 입장이 상대적인 보편성을 가질 수 있음에 대하여서 열려야 한다는 측면을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사실이라고 함을 말할수 있음을 인하여서(클릭 본문참조하세요) 그 특정 집단의 편견이라는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고 절대의 재가가 있는 절대의 보편성이 있는 증거적 사실이 성립되어지기 때문에 그 상대적인 판단의 범주에서 비로소 기독교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즉 다 상대적이라고 하는 측면을 강조하여서 그들의 입장을 추구하려고 하겠지만 그러나 형태적인 측면에서 상대적인 한 견해라고 기독교측을 편협하게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절대자의 보편성의 부여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는 최소한 그 개연성을 인정할 때에는 그 자체적 정당함까지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이 자존적 절대 보편성의 재가가 있다는 점에서 결국 상대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또한 상식적인 결론적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식적으로도 핑계못하는 복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2, 문학의 자유와 보편성에 대하여서

어떤 이들은 문학이라고 하는 것 '글쓰기'Writings'라고 하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것이고 허구를 다룰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실재의식에 국한해서 쓰일 필요성이 있겠는가 하는 것에 대한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이 역시 한정되어진다는 점에서 제한되어진 범위를 가지는 것으로써 정체성을 가져야하는 윤리성은 배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각주1)

그런데 데리다의 글쓰기와 같은 차연이라고 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규정되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니체의 '메타 해석 인식의 증식'이라는 것과 상관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성립되어짐에 대한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면 자유라고 하는 것을 방종으로 이해함의 당위성을 말하는 그런 안티적 자유의 모습을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즉 규정되어짐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과 그 규정되어짐의 실존이 없다는 것은 항상 동일한 사실로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상대적인 보편이라고 함의 자유라고 함에 있어서는 표현할 수 없다고 하여도 실존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한되어진 윤리적 사실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택스트를 해체함에 대한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상대적인 택스트라고 비로소 본다면 그것은 이미 잘못된 인식으로써 임의적 메타해석적 인식의 증식을 주장으로 자신들의 안티적 성경해석의 당위성을 말하고 있는 것밖에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은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따른 자신의 절대 주권적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으로 표현하였음에 대한 것을 상대적으로도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할 때에 그 자체적 정당함이 절대적인 것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함으로써, 그 택스트는 비로소 상대적인 범주의 사실적 판단이라는 범주적 판단을 비로소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의 재가를 받았다는 것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영감을 상대적으로도 온전하게 절대적으로 나타내실 수 있고 내셨다는 점에서, 비로소 상대적인 범주만으로써의 해석적 임의성은 그 가능성의 정당함을 따라 해체적 재구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실에 대한 강요적 인식을 구축하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다빈치 코드(Da vinci code)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임의적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개연적 사실로써 재구성된 것으로써 총체적 부정되어진 상대적 정당성으로써 자존적 절대의 보편과 정당함의 재가가 있는 상대적인 사실을 판단할 수 있다고 자신과 독자를 기만하고 있는 거짓으로써의 것밖에는 실존적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문학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그 발생적 학문의 기원과 상관성에서 볼 때에 그 상대적 보편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상대적 보편이라고 함의 판단 범위설정에서 한정된 경계선을 말할 수 없다고 하여도 그 경계선이라고 하는 윤리적 가치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상대적 보편의 참된 사실과 타당성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적인 판단의 범위에 있더라도 상대적인 개별적 특수성도 감안해야 함이 보편의식에 어울리는 것이고 그러한 가운데서 판단을 내림도 허용되어질 수 있지만, 신앙과 신학의 개별적 특수성은 그러한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이 그 가치와 사실의 취급에 타당성을 말할 수 있는 한정되면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인 자유함의 실제를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인 자기 계시를 하실 수 있다는 것과 계시하심으로써 자존의 절대의 보편성이 부여된다면 비록 형태적인 측면에서의 상대적인 모습이라고 하여도 비로소 동일한 상대적인 범주에서의 판단을 한다는 것은 잘못된 판단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것이며,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성에 따른 이해에서 상식적으로도 다빈치코드가 상대적인 안티적 합리성의 재구성을 가지고 비로소 상대적 해석적 당위성을 말하고 공포하는 매체를 선택한 것은 잘못이며 상대적일 뿐이라는 불가지론적인 개념에서의 타당성에 의한 기만적인 의지의 표현밖에 안되는 것임은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것이 다빈치 코드거짓기만인 것입니다.

특정 집단으로서의 우리 기독교에 대한 성립되어지지 않는 사실로써의 임의적 의지의 표현으로써 피해를 입혔다면 사회적인 법적 소송도 가능하고 또한 사실심리에서도 사실이성립되지 않는 안티적 다빈치코드의 반론의 사실들도 모두 기각되어진다는 것을 일반상식에서도 말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다빈치 코드와 그 아류의 사상들이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하여서 어떤 영광을 비로소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면서도 그 영광을 가리려고 한 미수적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인 사실로써도 판단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자의 글을 문학계에 '빅뱅'(big-bang)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폭'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물러나 빅뱅의 의미가 처음이라고 하는 어떤 개념을 수행적 모순에 따라서 인정한다고 하여도 그 파편들이 실재적인 의미를 가질 때에 그것이 성립이 되어질 수 있지, 이 다빈치 코드와 그 아류들은 그 사실의 실존을 정당하게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소실로 보게 되어지는 '자폭'이 어울리는 것임을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와 일반 사람들 앞에서 그 행한 것에 대한 법적인 소송적 입장에서 대응함에 동의하면서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심판하심에서 그 존재의 고민과 변명을 해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도록 주의 은혜가 회개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함께하시기를 기도하며 글을 맺습니다.





각주1) 문학과 철학의 상관성을 이해한다면 문학의 독립적 표현과 상관성이해에서 자유와 보편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포스트구조주의적인 개념에서의 글쓰기와 해체라는 것의 보편성은 일반적으로 데리다를 비롯한 자들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수 있는데 이들의 글쓰기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문학의 자유와 보편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한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별력이 없는 가운데서는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실 우상주의라는 반론이 있다면, 그 '사실우상'이라고 함의 인식적 판단이 이미 부정되어진 것이라고 함을 생각할 때에 그런 규정은 의미가 없음을 지적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처럼 데리다의 글쓰기와 같은 어떤 문맥적인 규정적 개념의 택스트를 해체하는 작업이라고 하는 것을 허락되어질 수 있는 허구와 관련되어서 우리의 삶에 유익할 수 있는 측면을 유도해내는 문학적 입장의 가치과 자유와 보편성을 일반적으로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정되어져야 하고 그것은 윤리적 판단을 받음에 전혀 합당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 문학이라고 함과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그 생성적 과정을 볼 때에 상대적인 보편성에 있어서도 한정되어진 보편성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요구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데리다의 차연의 철학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것은 니체의 사상을 해석하는 계보 가운데서 파생되어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독립성을 말한다고 하여도 비로소 절대적 분립의 독립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즉 상대라는 범주에서는 절대라는 것이 비로소 개념적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임의적 허용이라고 하는 것과 절대자의 자기 계시적 나타냄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전자는 상대적 절대라는 개념이 진정한 절대의 실재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후자의 입장의 당위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측면을 마음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적 보편이 비교되어질 수도 있고 한정되어질 수도 있고 그 제한적 범위를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은 쉽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즉 자연수의 집합은 유리수의 집합에 포함되어지고 그 유리수는 실수에 포함되어진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모두 무한집합이면서도 부분집합적 개념을 가지고 있고 연산이라고 하는 것도 제한되어진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집합론을 말하는 것은 이미 기호이론이라고 하는 것의 합리적 변증법이라고 하는 것과 문학의 논리라고 하는 것이 이러한 것의 영향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즉 형식논리학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논리적 개념과 순서쌍에 따른 경우에 따라 변증법적인 문학적 논리를 펼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문학의 자유를 위한 변명으로써의 논리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것과 같이 임의적 자유(freedom)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이면서도 자유(liberties)를 말하는 것으로 제한적 윤리와 상대적 보편이라고 하는 것에 따른 학문의 범주설정이 사실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욱 이러한 상대적인 보편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의 보편이라고 함을 의식해야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그 경계선이라고 하는 것을 표현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그 경계선이라고 하는 것의 실존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 사실이라고 하는 것의 실존이 자존의 절대자의 재가가 있다는 점에서 그 범주의 설정이해를 바르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요일, 5월 18, 2006

절대의 권위와 전문가의 권위의 개념인식부족을 지적하며

글을 아주 잘 쓰셨습니다. 하지만 몇가지 지적하겠습니다.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러셀이 의견과 진리를 말함에 있어서 그 차이를 지적한 바를 기억하는데 의견은 거짓되어질 수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사실을 말할 수 없다는 그러한 불가지론에서 님의 말이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냥 거짓일 수 있는 의견일뿐이라는 점을 인정하시는 것이 님의 입장에서 정직할 것입니다. 그리고 잘 나가다가 욕으로 마치는 것은 글쎄요.. 진정한 답변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량을 구하는 것으로써 해석해야 하는가요.. ^^ 전문가의 권위와 절대의 권위를 임의적으로 비교하여 말씀하시고 있군요.. 님의 말씀이 신의 절대의 재가가 있는 권위라고 할 수 있던가요 그렇지 않다면 님의 임의성은 객관성으로써의 사실이 성립되어지지 않습니다.


제가 말한 합리성 자체에서 그 정당함이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사실이 객관적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성립되어지지 않은 가운데서는 전혀 성립되어질 수 있는 가능성만이 있는 말뿐인 것으로 그냥 그렇다는 소리밖에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님께서 말씀하신 몇가지에 대하여서 지적함으로써 예의를 갖출 필요가 있겠군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인용하심에 있어서
제가 앞서 말씀드린 것으로써 칸트라는 그 전문가의 권위와 그에 따른 합리성과 자존의 절대자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따른 절대 권위와 그에 재가를 받을 수 있는 상대적 합리성이 비교가 되어진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그것은 아니라는 것은 생각하심이 이미 판단의 범위설정을 잘못하신 것이라고 함을 말하겠습니다. 칸트적 발상적 이해의 유비적 접근은 저의 접근과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으로써 수행적 모순이라고 하는 개념으로도 용납되어지지 않군요.. 상대방이 말하는 것에 대한 대화적인 개념에서의 인정은 하는 것이 담론의 윤리라고 함을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하의 글들은 이미 담론의 윤리적 개념도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임의적으로 말씀하시고 반론하시는 형식만 갖추시는 것은 전혀 합리적 이성의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제 제가 비록 님의 전제적 합리성의 모순을 가지고 말씀하심에 있어서도 그모습을 전제로 하는 것이 수행적 모순이면서도 담론적 예의가 된다는 점에서 몇마디 님의 말에 대한 판단을 함이 옳을 것같군요..


1, 칸트는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말씀을 하셨는데 님의 입장은 불가지론적 입장인데 불가지론에서 개념의 성립을 말씀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드립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칸트의 이런 말을 성립된다고 인용하심은 그렇게 옳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칸트가 말하는 상대적인 개념에서의 당위성을 얻게 되어지는 개념의 납득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한 가운데서 말한 것임을 기억할 때에 그 개념은 역시 상대적으로 맹목적일 수밖에 없고 다만 다른 사람의 동의적 차원에서 말한 것뿐이라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즉 절대의 보편성과 정당함이 부여되어지는 상대적인 것을 비로소 상대적인 것으로만 생각해서 동일범주에서 판단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말씀하심은 이 권위에 대한 임의적 발상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즉 칸트는 신앙에 대하여서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자입니다. 다만 신앙에서 칸트와 동일한 실재의식을 가지지 않는 가운데서도 동일한 표현이 가능하지만 그 역은 상당히 고려해야 할 점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2, "당신은 당신의 신에 대한 인식이 절대적인지 상대적인지를 어떻게 논증할 수 있는가?"

이것은 이미 앞에서 다른이와 논의한 가운데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더 말할 가치가 없는 것이지만 신인식의 절대적인지 상대적인지에 대한 논증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질문 자체가 성립되는가 하는 것을 말해야 그 답을 강요할 수 있는 당위성이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역시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논증의 성립이 되어지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말씀하심에 있어서 저도 표현적인 측면에서 동의하지만 실제적인 측면에서는 생각을 달리합니다.

그렇게 말함에 있어서는 논증이라고 함이 실제로 사실을 말할 수 없지만 주의 복음을 인식함에 있어서는 그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실재론에 입각한 실제론인데.. 그것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하지 않으시고 일반적인 인식적 차원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 근거를 제시함에 있어서는 글이 길어짐으로 링크하겠습니다. 여기입니다.

부언설명을 하면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이 그 자체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해석학에서 가다머는 권위라는 것은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취하여지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지만 상대적인 측면에서 비로소 말한다면 그것이 최대한 선일 수 있으나 상대적인 것에서 절대라고 비로소 말할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고자 할 때에 그 가다머의 권위 의식도 상대적인 합리성으로 제가 한 말에 당위성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인 것을 가지고도 절대적으로도 말할 수 있음과 그렇게 함에 있어서 상대적인 권위라는 형식적인 개념만 비로소 유비로 생각해서 비교판단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것입니다. 비교범위가 동일범주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몰러님은 전혀 비합리적인 비교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는 헤겔이 말하는 자충족해가는 발전적 개념의 자아의식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둡니다. 헤겔은 오히려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마음에 두지 않고 시작하고 있음을 그의 법철학강요에서 분명히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에 즈음해서..

기본적인 상대방을 이해하시고 자신의 입장에서도 충실하게 말씀하심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제가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은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헤겔적인 신관이 아니라는 것과 칸트의 개념언급이라고 하는 개념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그 선험적 개념으로 말씀하심은 전혀 저의 입장을 이해하시지 못하시고 비판하신 것입니다.

더욱 제가 말하고 있는 상대적인 것이 절대의 자존적 정당함을 입고 있다는 것을 말함에 있어서 왜 다른 사람만 상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는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느냐 이것이 이중적인 모순이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이것은 저의 합리론에 대한 이해하시지 않으심에서 님의 오해에 비롯되어진 것입니다. 상대적이면서도 구별되어진 것으로 절대의 재가가 있는 사실이 있음은 절대의 보편과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상대성의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것으로서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의 복음이 핑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증거는 상대적인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주의 말씀의 뜻하심을 따른다면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권세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임의적인 판단하려고만 하는 가운데 그야말로 불가지적 개념에서 최선의 전문가의 권위와 합리성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 자체가 자기 모순을 상대방에게 합당하지 않게 이입해서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 목 인식론적 상대주의 고찰(이중잣대 비판)

이 름 몰러

( 125.♡.23.240 )

조 회 84 [스크랩]  [프린트]






기독교인들은 인간(인간의 인식,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대해서는 상대주의를 적용하고, 신(신의 존재, 신에 대한 관념, 신이 보여주는 행동)에 대한 인식에서는 절대주의를 적용한다. 이명신씨가 늘상 하는 강아지 풀 뜯다가 지렁이 등뼈 씹는 소리들을 정리하면 모두 이러한 이중잣대에 귀착된다. 도대체 "신은 절대적 합목적성을 갖고 있다"는 헤겔식 발언(시비거는 분이 있을까봐 말하는데, 헤겔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명신이 한 말은 사실상 헤겔식이라고 할 수도 없는 짝퉁 헤겔이다) 자체가 상대적 인식이라는 것은 왜 모르는지...
물론 신은 절대적이라고 하며 나름대로의 선험적 명제론을 내세우지만, 그러한 신을 말하는 자신들이 신인가? 신을 다 아는가?

호교론자들의 상대주의는 정당성을 상실한 불공정한 규칙의 게임이며, 이중잣대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어떤 주장을 펼치다가 논리적 반박에 직면하면,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전제(이것은 참이다)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논리(논리학)가 절대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변호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상대주의를 살펴보자.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현상의 질서와 규칙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 자신이 또는 우리 마음의 본성이 그러한 질서와 규칙을 만들어 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것을 자연 안에서 결코 발견하지 못랬을 것이다." - 칸트 『순수이성비판』

러셀은 칸트가 데이빗 흄의 태클, 즉 회의주의 때문에 기나긴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 3대 이성비판서를 작성했고, 그 이후 다시 독단의 잠으로 빠져들었다고 비아냥댔다. 다시 말하자면 이성비판서 이후에 나온 칸트의 저작들이 그리 보기 좋지 않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은 무지하게 어려운 3대 비판서를 보다가 지쳐서 러셀의 평가를 그냥 받아들이기만 할 뿐이다(나도 그렇다). 다시 말해 "순수이성비판"이 흄의 회의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집필되었다는 사실을 "믿고" 만다. 그러나 여러 철학자들의 공통된 해석들은 비록 칸트가 동의할지 여부는 미지수지만 우리가 차용해 볼 수는 있겠다.

어쨋거나 "순수이성비판"의 전체적인 경향은 그렇다 하더라도, 일부 chapter나 paragraph는 여전히 칸트가 독단적이며, 회의주의에 적절하게 반론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 많다. 위에 인용한 인식론에 대한 문장이 그 한 예다. 이명신씨가 즐겨 칸트를 씹는 대목이기도 하다(예전 게시판이나 기비평 까페를 뒤져보면 이명신씨의 찬란한 역작 "칸티안의 후예들에게"라는 글을 볼 수 있다). 각설하고...


사실상 위에 인용한 문장 등이 근대적 상대주의의 시작이라고 간주되고 있는데,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평가되는 니체보다도 수십 년 앞서는 것이다. 상대주의도 여러 유형이 있다. 이중에서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모든 진술이 배경과 전제조건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가치판단이든 가치중립적 판단이든 간에 모든 판단의 진위가 상대적이라는 입장을 가진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판단의 진실성을 담보해주는 객관적 기준 따위는 없다고 보고 있으며, 그 원인은 언어의 애매성, 개개 지각의 불일치 및 한계 등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형태의 상대주의도 객관적 준념, 즉 개념의 틀이 없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먼저 칸트가 이성비판을 집필하게 된 동기가 된 회의주의의 기본개념은 "나의 지각"이 과연 "저기 저 바깥"에 있는 사물을 정확하게 재현하는지 잘 알 수가 없다는 입장이다. "내 지각을 제쳐두고" 그 사물을 직접적으로 알아 볼 방법이 없다는 문제에 대해 칸트는 "마음이 수동적인 지각자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경험의 세계를 구성하는 구성자"라고 주장하며 회의주의를 극복하려 하였다. 만약 시각적 흐름을 해석해 주는 인식 구조가 없다면, 순간순간의 규칙성은 사라지고 그 어떤 사물도 지속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아예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격한 의견도 있다). 그래서 칸트는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고 하였다.

칸트의 이러한 시도, 즉 지각에 대한 마음의 기능을 재해석한 결과는 회의주의를 극복하는 효과는 거둘 수 있을지 모르나 극단화된 주관주의로 흐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결국 지식과 진리는 지각자 각각의 입장이나 해석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인 것이 되고 만다. 물론 칸트는 지각자가 의식을 일으키는데 몇 가지 공통적인 기본 지침, 다시 말해 개념의 틀을 따른다고 하였지만, 여기에는 객관적으로 타당한 방법이나 기준이 없다. 어떤 방법이 다른 방법보다 더 낫거나 나쁠 수는 있지만 말이다. 물론 이마저도 과격한 상대주의자들에 의해 부정된다.

여기에서 상당수의 유신론자들은 신이나 악마가 개념의 틀에 의해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는 신을 포함하는 개념의 틀이 신을 배제한 개념의 틀 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다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란다. 나아가 우월성이나 열등성을 판단하는 비교평가 기준조차도 없다는 인식론적 상대주의자들의 주장을 인용한다. 우열을 가리는 것, 즉 개념의 틀에 대한 등급이나 서열을 매기려면 합리성이 바탕이 되어야 하나 그런 기반은 없으며, 합리성은 이미 개념의 내부에 들어 있기에 중립적인 합리성은 없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상대주의는 여기에다 "모든 관점이 타당하다"는 주장을 덧붙인다.


여기에 대한 반론은 여러가지가 있다.

"객관적 외부세계"란 인간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세상이 있다는 것이며, "진리대응설"은 어떤 진술의 참됨은 마음과 상관없이 세상의 참된 사실과 일치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는 것이 인식론적 절대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여기서 객관적 외부세계를 부정하면 관념론자가 될 것이며, 진리대응설을 거부하면 인식론적 상대주의자가 된다. 인식론적 절대주의자들은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반대하여, 사람들의 의견 차이는 있겠지만 그런 차이가 객관적 외부세계에 대한 인정이나 진리대응설과 불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유신론자들은 객관적 외부세계를 부정하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신이나 악마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

다른 반론은, 모든 관찰에 이론이 개입된다는 주장은 받아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관적 진리밖에 없다는 주장"은 거부한다. 물론 유신론자들도 여기에 동조하기는 하지만, 이들 중 일부는 인간의 일은 모두 주관적이며, 신의 일은 객관적 진리라고 주장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서두에 말했던 불공정한 게임을 하는 것이다.(이명신이 말장난을 하는지 정말로 언어장애가 있어 그런지 모르지만, 끈기를 가지고 그의 주장을 해석해 보면 결국 이중잣대에 불과한 주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효과적인 반론은 인식론적 상대주의의 주장들이 실은 상대주의를 스스로 부정한다는 지적을 하는 것이다. 상대주의의 주장대로 모든 판단이 상대적인 것이라면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타당하다"는 판단의 진리 자체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마치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는 어느 크레타인의 발언이 모순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또한 이를 일부 유신론자들의 주장에 적용해보면 서두에 말했던 것과 같은 것이 된다.
"당신은 당신의 신에 대한 인식이 절대적인지 상대적인지를 어떻게 논증할 수 있는가?"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부정하는 증거(?)는 역설적으로 상대주의가 씹어대고 있는 과학이다. 인식론적 상대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적 탐구의 결과가 과학자의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인식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현대과학의 성공은 그 주장을 무색하게 한다. 물론 과학(과학자)이 항상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객관성과 재현성, 그리고 반증가능성을 앞세운 과학은 "인식론적 상대주의가 전적으로 타당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한 가지 말해 둘 것은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은 그 출발에 있어서 상대주의의 방법을 차용하고 있으나, 주관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개개 관찰자의 객관적 관찰의 결과가 상대적인 것일 뿐이지 주관적 인식을 바탕으로 상대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종교인들은 신의 절대성에 비해 과학이 상대적인 지식에 불과하다면서 인간과 과학을 폄하한다. 이런 현상들은 오해의 결과가 아니라 무지의 결과이다)
빛의 속도가 초속 29.9790...만 킬로미터라는 것과 개개 관찰자의 운동상태에 관계없이 일정하게 관찰된다는 사실, 모든 물체는 별도의 항력이나 추력이 없는 한 땅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정확하게 말해서 모든 물체는 인력을 가진다는 사실), 속도가 증가하면 질량(무게와 개념이 다르다)이 증가한다는 관찰 등에는 상대주의가 끼어들 구석이 없다. 도대체 객관적 진리 따위는 없다고 주장하는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과학적 탐구가 무엇을 지향한다고 보고 있는 것인가?

과학적 견해들과는 상관없는 분야에 대해서도 인식론적 상대주의가 항상 타당한가 하면 그렇지 않은 구석이 많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자신들의 논리적 근거로 "모든 이가 옳다"는 것을 들고 있고, 또한 서구적 방식만이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는 그 성과들을 근거로 하여 상대주의가 똘레랑스와 자유주의를 표방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철학적 이론이 바람직한 결과를 불러왔다는 점을 근거로 그 이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며, 또한 상대주의가 자유주의적 특성을 갖고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상대주의적인 똘레랑스의 심각한 결점은 상대주의나 그 해석의 어떤 결과들 중에는 분명하게 유쾌하지 못한 것이 있다는 점이다. Ku Klux Klan 단원이나 슈퍼맨의 호적수 렉스 루더도 나름대로 자신의 개념의 틀 안에서 옳은 행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인종차별주의나 세계정복을 바람직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인종차별주의 같은 것은 타인에 대한 문제이니 그럼 개인의 문제에 국한된다고 볼 수 있는 것도 살펴보자. 종교적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을 예로 들면, 그들의 행동은 먼저 인간(생명)의 가치를 격하시키는 결과를 불러왔으며, 과학(의학)에 대한 부정으로 인간이 누릴 혜택을 거부하거나 박탈하려는 시도를 한다는 점이다
(과학을 비판하는 종교가 많지만, 아미쉬 이외에는 과학을 비판할 자격을 가진 종교가 없다. 많은 국가에서 발행되는 파수대가 맥킨토시 전자출판 프로그램으로 작성되어 배포된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고 해야할까? 비웃어야 할까?)
피를 먹지 말라는 계명을 내려준 신의 의도(사실은 문화/문명적인 이유 혹은 위생적인 이유에 의한 율법일 뿐이다. 동물의 피는 쉽게 변질되고 또한 배탈을 유발하기 때문에 못 먹게 한 것이다)는 생각하지 않은 채 무조건적으로 수혈을 거부하는 행위를 과연 관용의 범주에 넣어 "네 맘대로 하라"고 하면서 방치해야 할 것인가?


권력의 횡포, 권력의 타락이나 사회의 분열과 전쟁을 막아주는 것은 상대주의적 똘레랑스가 아니다. 오히려 각자가 상대방에게 똘레랑스(이때는 관용보다는 양보의 의미)를 강요하며 분쟁을 조장할 뿐이다. 독도문제에 대한 일본 지도자들의 망언을 보라. 자유주의적 똘레랑스(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맘껏 자유를 누림)가 근/현대 민주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지 상대주의적 똘레랑스가 자유주의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어떤 개념의 틀에서는 참이지만, 다른 개념의 틀에서는 거짓일 수가 있다.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그 자체도 상대주의적 비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상대적이지 않은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상대적인 것"에 대해 상대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절대적 존재가 존재함을 상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상대적이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기가 지난하고, 아예 인식조차 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절대적인 존재가 무엇이며 어떤 것이라는 것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인식론적 상대주의든 인식론적 절대주의든 간에 말이다.

함부로 절대성을 가진 존재가 주는 축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설명이나 설득도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존재가 주는 축복을 누리기 위해 어떤 바보짓도 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런 축복을 반대하거나 회의하는 사람들에게 분노나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그들은 절대로 자신의 인식결과가 상대적임을 말하지 않는다.
이런 자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여전히 한 가지밖에 없다.


"조까~"





독단과 협잡을 거부하며~


작성시간 : 2006-04-29 11:4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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